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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22. 2024

[프롤로그] 작지만 든든하고 흐뭇한 동행

엄마, 나만 따라와

엄마, 나만 따라와. 내가 지도를 들고 있으니까, 지도자(地圖者)야!


듣자마자 푸핫 웃음이 나왔지만, 금세 순한 양이 되어 다섯 살 ‘지도자’를 따라 걸었다. 지도자의 뜻도 모르는 어린아이지만, 지도를 들고 심각하게 여기저기 살펴보다 가야 할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보면, 정말 지도만 들고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무리를 인도하는 지도자(指導者)로도 손색이 없다. 어리다고 무시할 게 아니라, 지도를 보고 파악하는 눈이 예리한 게 길치인 엄마 보다 백 배 낫다. 다섯, 여섯 살 두 아들을 데리고 처음 한 달 살기를 떠날 때만 해도 정말 가능할지 확신이 없었다. 해외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에 겁이 나고 두려웠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고 나면 금세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작지만 든든한 동행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맥주 다 마시지 마. 엄마 잠들면 우리 큰 일 나.


엄마, 맥주 다 마시지 마. 엄마 잠들면 우리 큰 일 나.


퐁피두센터 앞 작은 광장에서 아이들에게 쇼콜라 쇼를 시켜 주고 삐꽁 비에르* 한 병을 시켰을 때였다. 아빠도 없고 엄마뿐인데, 혹시라도 엄마가 취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는지 막내아들이 던진 말이다. 일행 전체의 안전을 고려하는 아이의 염려가 대견했다. 이런 녀석들과 함께라면 세계 어디든 가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린 두 아이와 의견을 나누고 결정하며 매일매일의 일정을 만들어가는 여행은 그전에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의존하던 여행보다 몇 배나 생동감 있고 활력이 있었다



툴르즈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샤를 드골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간단히 점심을 먹을 때였다. 카페테리아 안에 사람들이 많아 자리를 찾기 쉽지 않아 보였다. 샐러드와 음료 등을 골라 계산하고 쟁반을 들고 돌아보는데, 아이들이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내가 음식을 골라 계산하는 동안  빈 테이블을 찾아 자리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겨우 둘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밖에 자리가 없자, 어느새 자기들이 의자 하나를 구해다 놓았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감동했다. 유치원생들이라고 얕봤던 마음이 오히려 미안했다. 혼자라면 몹시 두려웠겠지만, 두 아이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뛰어! 놓치면 안 돼!


엄마, 뛰어! 놓치면 안 돼! 


찾고 있던 버스 번호를 발견하자, 아이들은 내 손을 붙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다음 버스를 타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머뭇거렸는데, 그런 엄마를 끌고 달린 아이들 덕분에 용케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체력도, 열정도 팔팔한 동행 덕에 나는 여름이 되면 한 달 동안 내 나이 반쯤은 떼어 내고 다닐 수 있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트램 티켓을 사는 아이들


엄마, 화장실은 분명 저쪽이야. 어떤 사람이 물어보니까 웨이터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저기를 가리켰고, 물어보던 사람이 그쪽으로 갔어.


현지 언어를 못해도 걱정이 없었다. 관찰력과 눈치로 답을 얻어내는 아이들 덕분에. “엄마, 이제 젊은 아저씨한테 물어봐.” 툴루즈에서 기차역을 찾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을 때마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바람에 한참 동안 길을 헤매고 있었다. 막내아들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길을 잘 아니까 (아빠와 엄마를 보고 내린 결론이지만…), 남자에게 물어보라고 조언을 했다. 보호자 밑에 수동적으로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 마주치는 모든 문제를 함께 풀던 아이들. 이들은 분명 진정한 의미의 동행이다. 그것도 아주 든든하고 흐뭇한 동행.



이 책은 두 아들이 다섯, 여섯 살 때부터 매년 여름 한 달 살기 여행을 떠나, 9년간 세계를 누빈 유쾌한 모험담을 기록한 여행기다. 9년 동안 엄마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아이들은 쑥쑥 자랐고, 엄마인 나도 함께 성장했다. 낯선 땅에서 펼쳐지는 짜릿한 사건들과 그 속에서 발견한 가족사랑 이야기.



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삐꽁 비에르(Picon Biere) : 오렌지 향 리퀴르를 넣은 맥주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소설미학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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