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 센터(Getty center)_미국 캘리포니아
거리에서 무표정한 얼굴의 좀비를 자주 만난다. 영혼도, 기쁨도, 생기도, 자유 의지도 없는 좀비들. 특히 공허한 시선과 잿빛 얼굴의 어린 좀비를 만날 때면 우울해진다. 거리에서 어린 좀비와 마주치자, 문득 아이들과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물 때 게티 센터 (Getty center)에서 보냈던 하루가 생각났다.
트램을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산을 오르던 아이들. 세기를 넘어선 다양한 그림들이 전시된 전시관 안에서 이리저리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아이들. (때론 뛰어다니기도 하고, 조금 소란스럽기는 했다) 어떤 그림 앞에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참을 골똘히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그림 앞에서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키득거리며 웃던 아이들. 아이들은 나비며 곤충들을 그리거나 거울의 방에 들어가는 등 다양한 미술 관련 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전시관을 모두 돌아보고 나와 잔디밭에서 인형을 높이 던지며 즐겁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석유 재벌 덕에 게티 센터에서 우리는 그림과 조각뿐 아니라 실내장식품, 시계, 사진 등 다양하고 귀중한 미술품을 무료로 볼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입구까지 트램이 운행되는데, 아이들은 트램을 타는 것마저 기차 여행이라도 되는 듯 즐거워했다.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흰색 건물들은 현대적으로 지어놓은 신전 같았다. 브렌우드 언덕 정상에서 LA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도시의 소음과 복잡한 교통, 그리고 일상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미술관을 누비며 풍성한 작품을 무료로 볼 수 있다니.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자리를 잡은 한국인 애니메이터의 말이 기억났다. 그는 한국에서 과외도 받고 학원도 다니고 열심히 미술을 공부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을 누비며 다양한 그림을 접하고 그 색감을 익힌 외국 아이들의 감각을 따라잡기 힘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밤새워 연구해 힘들게 만들어 낸 색채를 별 노력 없이도 툭 끄집어내는 그들을 보면 기가 죽는다고.
“네가 오늘 입고 있는 푸른색 스웨터, 네가 그저 푸른색이라고 생각하는 이 색은 사실 ‘셀룰리안 블루’다. 2002년 오스카 드 라 렌타가 처음으로 드레스를 만들었고, 그 이듬해에 구찌가 재킷을 만들면서 너도 나도 그 색을 썼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
보통 사람의 눈에는 똑같은 두 가지 푸른색이 전문가의 눈에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다. 두 가지 푸른색 벨트를 놓고 고민하지 않으려면, 수없이 다른 푸른색을 접해봐야 한다. ‘빨강에 노랑을 더하면 주황’ 하는 식으로 배우고 외우는 아이들과, 박물관과 미술관을 제 집 드나들 듯 다니며 뛰어난 예술 작품에 표현된 다채로운 색감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 중 어느 쪽이 더 다양한 색상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까.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자 숙제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도울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엄마가 손을 대는 순간 교육은 망가진다는 것이었다. 3+4를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워가며 열심히 세고 있는 아이를 보면, 솔직히 답답하다. ‘그것도 빨리 못해?’하고 잔소리하고 싶어 진다. 한국 아이들만 유독 책상 밑에 손을 가리고 계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손가락을 펴고 계산하면 엄마한테 혼이 나기 때문에 무서워서 몰래 손가락을 숨기고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했던 전문가는 손가락을 써서 계산을 잘하는 아이가 커서 논리적으로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잘 풀 수 있다고 했다. 곱하기의 원리를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아이에게 눈 딱 감고 구구단을 외우라고 시키는 엄마는 수학 공부 열심히 해 보겠다는 아이한테 대신 음악을 하자며 노래 가사를 외우게 하는 격이다.
엄마라는 권위의 자리에서 어줍지 않은 지식과 생각으로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일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아이들은 들은 대로 하지 않고, 본 대로 한다. 책 읽어라, 말 잘 들어라,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고, 부모가 먼저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편이 낫다. 남을 돕는 모습을 보여주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웃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잔소리 따위 하지 않아도 우리의 아이들은 멋지게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안뇽-하-쎄-요
떠들썩하게 전시실 안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갑자기 한국말이 들리는데 한국 사람이 눈에 띄지 않자 두리번거렸다. 그 인사가 피부색이 검은 히스패닉 미술관 지킴이 아저씨에게서 나왔다는 걸 깨닫자, 막내아들은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아저씨 손에는 종이 뭉치가 잔뜩 들려 있었고, 그 종이 위에는 여러 나라의 글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한국말로 설명해 주었다. 감탄하며 고맙다고 하자, 아저씨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냐며 ‘인과응보’가 무슨 뜻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누군가에게서 들은 그 말을 적어놓았다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묻고 배우고 있었다. 내가 머물고 일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늘 새로운 걸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하나라도 더 머릿속에 집어넣어 주겠다고 아이들 귀에 잔소리를 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더 많은 것을 아이들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는 엄마. 더 넓은 세상으로 아이들 손을 이끄는 그런 엄마. 내가 보았고, 또 보고 있는 것들 뿐 아니라 보지 못한 것들까지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들이 죽은 ‘좀비’ 대신 파릇파릇 살아서 뛰노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소설미학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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