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프, 스완지, 프레스타틴 _ 웨일스
매년 아이들과 한 달 여행을 반복하다 보니, 여행과 함께 나도 성장했다. 숙소를 정하는 일만 보아도 그렇다. 처음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동생 집에 머물렀다. 프랑스나 싱가포르에 갔을 때는 친구나 친구가 예약해 준 숙소, 한국인이 하는 민박에 머물렀다. 그 후 차츰 용기가 생겨 낯선 이의 집에 머물기 시작했다. 웨일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도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머무는 지역마다 낯선 이의 집을 빌렸다.
사이먼의 집은 카디프 대학교 (Cardiff Unversity) 근처 대학생들이 몰려 사는 그리에 있었다. 작고 소박하지만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 손때 묻은 책들, 작은 펭귄 인형들, 엽서와 작은 기념품들이 사이먼이 이 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여행 중 짐을 최소화하느라 책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사이먼의 책장에서 로알드 달(Roald Dahl)의 책을 찾아내고 신이 났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로알드 달은 마침 웨일스 카디프에서 태어났다. 여행 목적지를 고를 때, 아이들이 웨일스를 택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평소에 남편이 출장만 가도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잠을 잘 못 이루는 겁쟁이였는데, 사이먼의 집 어둠 속에서는 편안했다. 불을 모두 끄고 잘 수 있다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이었다.
꿈 한번 꾸지 않고 잘 자고 일어나 눈을 떴다. 뒷마당이 있기에 문을 열고 살짝 나가 보았다. 마당이 크지 않았지만, 혼자 고요한 시간을 누리기에 맞춤했다. 뒷마당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손바닥만 한 하늘이 맑고 예뻐서 비로소 내가 여행을 떠나 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웨일스를 여행하는 동안 호들갑스럽거나 과장된 친절을 보여주는 사람들보다 쑥스러워하고 내성적이지만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스완지에서 농가를 빌려준 레이철도 역시 조용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집아 구석구석을 아주 깨끗하게 정성 들여 닦아 놓고 우리를 맞았다. 레이철은 우리가 집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바닥을 광이 나게 문질러 닦고 있었다.
값나가는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작은 부분까지 정성 들여 꾸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에는 집안 곳곳을 돌아보며 레이철의 세심한 손길이 닿았던 모든 것에서 그녀의 따스한 온기를 느껴 보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프레스타틴에 도착해 이본에게 연락을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캐러밴의 주인이 약속한 체크인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나타난 이본은 미안하다고 하며, 캐러밴 문을 열어 주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온통 먼지투성이에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침대 밑에서는 도대체 언제 썼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 얼룩 있는 찻잔과 바싹 말라버린 티백이 발견되기도 했다.
먼지와 얼룩 투성이인 조그만 캐러밴이 아이들에게는 천국이고 보물섬이었다. 캐러밴 곳곳에 있는 작은 수납공간마다 보물이 넘쳤다. 바닷가에 들고나갈 모래놀이 장난감이 한가득 들어 있었고, 비눗방울이나 바람 빠진 축구공, 작은 인형들도 있었다. 이본의 물건들뿐 아니라 전에 캐러밴에 머물던 많은 이들의 모든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뱀처럼 생긴 고무 뱀이 튀어나왔을 때, 나는 기겁을 했지만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여러 종류의 보드 게임도 있어 실내에 머물 때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첫인상과 달리 이본은 무책임한 집주인이 아니었다. 수시로 메시지를 보내와 말을 걸고 필요한 게 없는지 챙겼다. 내가 헤어드라이어가 없어 불편하다고 했더니, 바로 그날 오후에 언니에게 부탁해 사다 주기도 했다. 깨끗하고 깔끔함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이본은 따스한 배려와 소통을 선물해 주었다.
아이들은 프레스타틴에 일주일 머무는 동안 매일 찾아오는 갈매기 버디와도 친구가 되었다. 수많은 갈매기 중 버디를 알아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여행은 어디에 가느냐보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다시 느꼈다.
‘누구도 비밀을 가질 수 없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을 읽어낼 단서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 누군가를 잘 알고 싶다면, 그가 흘린 단서들을 슬쩍 기웃거려 보면 된다. 낯선 이의 집에 들어가 며칠씩 머물 때마다, 나는 주인을 닮은 집을 스누핑(snooping), 즉 염탐한다. 집주인의 방과 거실, 주방을 기웃거리며 그가 흘린 정보들을 보고 그의 성격을 짐작해 본다.
물론 흘려놓은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보란 듯이 거실에 걸어놓은 액자나 트로피 대신 침실 안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물건을 보고, 사적인 공간에서 혼자만 보려고 늘어놓은 작은 물건들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집주인과 직접 대면할 때보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집안에 스며든 그들의 성격과 인품을 상상하는 일은 직접 만나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 그 공간에 머누는 동안만큼은 내가 아닌 그 공간의 주인처럼 잠시 낯설게 살아본다.
낯선 땅, 낯선 이의 공간에서 잠시 내가 아닌 낯선 자로 살아보는 일.
여행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