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스트 국립 군사 박물관_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늘 경유하는 곳으로 여기다 보니, 네덜란드를 여행의 목적지로 삼을 생각은 못했었다. 웨일스에서 한 달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역시 암스테르담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며칠 머물면서 네덜란드를 여행해 보기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수스트 (Soest)에 있는 국립 군사 박물관(Nationaal Militair Museum)이다. 미군이 주둔하던 당시 공군기지로 사용했던 곳을, 미군이 떠난 후에 군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은 2014년 폐기된 구 왕립 육군 박물관과 공군 박물관의 소장품을 통합해, 45헥타르나 되는 넓은 부지에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10만 점 이상의 군사 유물과 무기, 장비, 군복 등이 전시되어 있고, 실내 전시장뿐 아니라 야외에는 탱크와 전투기 같은 대형 군사 장비도 관람할 수 있었다. 방문객들은 그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쟁을 체험할 수 있다.
갑옷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하는 곳에서 나와 아이들은 번갈아 칼을 휘둘렀다. 사람 모양의 마네킹, 그마저도 얼굴이나 팔이 없는 토르소뿐인 마네킹을 나무칼로 치는 것뿐인데도 나는 거부감이 들어 도무지 칼로 찌를 수 없었다. 사내아이들이라 나보다는 낫겠지 싶었지만, 아이들도 그다지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데이브 그로스먼이 쓴 <살인의 심리학>에 보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사선에서 싸우던 병사들 100명 가운데 오직 15에서 20명 정도만이 자신의 무기를 실제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쟁에 차출된 병사이고 자신이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대부분의 인간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많은 병사들이 제대로 조준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총을 쏘아댔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오히려 조금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대략 80% 정도나 되는 보통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칼을 휘두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거부감이 들었다.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
그래, 나는 생명을 주는 존재지. 아무리 전쟁에 끌려나가게 된다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과연 그럴까. 칼로 마네킹을 찌르지 못했던 내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군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는 목표물을 명중시키기 위해 초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다 목표물을 명중시킬 때마다 쾌재를 불렀다. 내가 쏘아서 명중시킨 목표물은 교회나 아파트일 수 있다.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 잔뜩 모인 곳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버튼을 누를 때, 내가 죽일 대상의 얼굴을 직접 볼 필요가 없었을 뿐. 칼로 찌를 때보다 버튼 하나로 훨씬 더 효율적으로 많은 생명을 뺏을 수 있다.
전쟁은 점점 더 쉽고 간편해진다. 심지어 게임처럼 스릴 있고 재미있어진다. 팔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간다.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 누구도 전쟁을 시작하자고 직접 결정하지 않았다. 전쟁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들은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언제나 피가 쏟아지는 현장에서 가장 먼 곳에 안전하게 있다. 만약 최고 권력자와 그 가족을 전장으로 보낼 수 있다면, 전쟁을 선포하는 결정들이 달라지지 않을까.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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