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플라이어 (Singapore Flyer) _ 싱가포르
경제평화연구소에서 발표하는 GPI (Global Peace Index)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Top 10에 속한다. (2023년 기준 세계 6위, 아시아 1위, 대한민국 43위, 중국 80위) 싱가포르에서는 파리에서처럼 지하철 타기를 두려워하거나, 소매치기가 노릴까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긴장한 채 다닐 필요가 없다. 영어와 중국어가 다 통하니 의사소통도 어렵지도 않고, 조그만 나라라 어디를 가 보고 어디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지라, 쉼을 누리기에 좋은 곳이다.
미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가깝기 때문인지, 너무 작은 나라라 볼 게 별로 없을 거라 여겼는지, 그도 아니면 너무 안전한 나라라 스릴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여행 전 설레는 마음이 확실히 덜했다.
싱가포르로 출발하기 위해 베이징 공항에 들어설 때부터 이 여행이 밋밋하고 지루할 거라는 내 짐작이 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 언제나 저가 항공권을 이용하는데, 그러다 보면 자정 넘어 출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밤중에 도착한 공항은 여행객들로 몹시 붐볐다. 체크인하는 줄마저 길었다. 아이들과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땀으로 옷은 이미 다 젖었고, 휘청거리다 주저앉은 채 캐리어에 매달리다시피 몸을 지탱했다. 공포가 찾아왔다. 내 옆에는 내가 돌봐야 하는 아이들 뿐인데, 이대로 비행기를 타도 괜찮은 걸까.
“엄마, 약속은 꼭 지켜야지."
"엄마는 절대 안 쓰러질 거야. 내가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한치의 망설임 없는 아이들의 단호한 대답에 죽을힘을 다해 일어섰다. 담요를 덮어쓰고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따뜻한 물로 떨리는 몸을 달래는 밤비행은 쉽지 않았지만, 여행은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 콸라룸푸르에 도착해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내릴 때, 식은땀이 겨우 멈췄다. 하루종일 먹지 못한 데다 고질병인 허리 디스크를 위해 먹은 독한 진통 소염제가 화근이 되어, 약해져 있던 몸이 휘청했던 모양이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허리 통증도 복통도 사라졌다.
출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싱가포르 여행은 순조로웠다. 어디를 가나 깨끗하고 안전했다. 살짝 지루해질 뻔했다. 빠르게 올라가던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정지하기 전까지는.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질색이지만, 아이들이 원해서 마지못해 대관람차(Singapore Flyer)에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던 길이었다. 싱가포르의 에스컬레이터는 속도가 빠르다. (싱가포르: 0.75 m/s, 한국: 0.50 m/s) 빠르게 올라가던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정지했다. '무슨 일이지? 별일이네.' 하며 남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려는데, 큰아이가 조용히 나를 부른다.
"엄마."
아이를 돌아보던 나는 기절할 뻔했다. 뉴스로만 들었던 '크록스 절단 사건'이 내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아이가 신고 있던 크록스가 에스컬레이터에 끼어 절단되었다. 여행 며칠 전 크록스를 사러 갔는데, 마침 꼭 맞는 사이즈가 없어 급한 대로 한 치수 큰 걸 사줬는데, 그게 아이를 살렸다. 딱 맞는 크록스였다면, 아이의 발가락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발길을 재촉했다. 얼른 대관람차에 오르자고. 한 칸에 최소 스무 명은 탈 수 있을 만큼 넓은데, 그 한 칸을 셋이서 통째로 차지했다. 에스컬레이터와 달리 천천히 도는 대관람차 안에서 싱가포르 여기저기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크록스라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크록스를 고집했다. 대관람차에서 내려 아이에게 새로운 크록스를 사주었다. 비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아이는 드디어 제 발에 꼭 맞는 크록스를 신었다. 그 후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발을 주의해서 보는 버릇이 생겼다.
모든 여행은 스릴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찾아간다 해도.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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