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레브, 플리트비체, 스플리트_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는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지만, 월드컵 기간에 맞춰 떠나게 된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특히 축구를 좋아하는 두 아들과 함께였기에, 월드컵의 들뜨고 신나는 분위기가 여정 내내 함께 했다. 자그레브에서 플리트비체를 지나 스플리트로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아이들과 나는 크로아티아의 열정적인 축구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그레브를 여행할 때였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청소부 아저씨들이 잠시 쓰레기차를 멈추고 축구를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공을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축구가 이곳 사람들에게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공원 잔디밭에 앉아 잠시 쉬려는데, 두 아들이 다 마신 콜라병을 축구공 대신 차기 시작했다. 월드컵 유니폼을 입고 쉬지 않고 뛰는 아이들은 영락없는 어린 모드리치다.
플리트비체를 여행할 때 머문 숙소의 주인 마리나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다. 우리 애들보다 어리고 숫기가 없어, 같이 축구하자고 불러도 처음에는 도망만 다녔다. 멀리 아시아에서 온 우리들이 낯설었기 때문일 것이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슬그머니 축구공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모드리치 세 명과 쌍둥이 두 아이가 크기가 다른 골대 두 개를 직각으로 놓고 축구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몸으로 하는 축구로 모든 게 통하는 모양이다. 떠나기 전날 작은 TV 앞에서 함께 크로아티아를 응원했던 일이 서로를 더 가깝게 만들었을 것이다.
월드컵 결승전이 있던 날, 스플리트는 이미 축제 그 자체였다. 시내 곳곳에서 들리는 환호와 노랫소리, 빨간 격자무늬 유니폼이 거리를 물들였다. 두 아들과 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 낡은 성벽이 그날의 스크린으로 변신해 있었다. 사람들은 성벽 아래 앉아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경기를 기다렸다. 테이블과 의자가 부족하자 계단이나 바닥에 모여 앉았다. 성벽에 투영된 크로아티아 국기는 사람들의 기대와 설렘을 고조시켰다.
경기가 시작되자, 모두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프랑스가 선제골을 넣은 지 10분 만에 크로아티아가 반격골을 쏘았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성벽 아래는 환호와 박수로 가득 찼다. 나는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떼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과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평생 이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월드컵이 열리기 전 우승 확률이 겨우 0.6%에 불과했던 크로아티아가 결승전에 오른 것만큼이나 희박한 확률일 것이다.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4-2로 승리했다. 크로아티아는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기적을 이뤄냈다. 그날 밤, 스플리트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지나가는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독특한 유니폼 디자인 말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던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 2위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뤄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Igraj Moja Hrvatska! (싸워라, 나의 크로아티아여!)
크로아티아 여행 내내 수없이 들었던 크로아티아의 응원가를 우리도 힘차게 함께 불렀다. 이 노래를 부를 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뭉클함이 솟아올랐다. 승리는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들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불안으로 청년들이 속속 떠나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한 크로아티아 국민 모두의 것이 아닐까.
월드컵과 함께 한 크로아티아 여행은 나와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축구를 통해 만난 크로아티안 사람들의 열정,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성벽에 비친 경기의 경이로운 순간들은 단순한 여행의 기억을 넘어 우리 삶의 중요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살아가면서 가능성이 1%도 안 되는 불가능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나와 아이들은 이 추억을 떠올리며 끝까지 도전해 볼 힘을 얻을 것이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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