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프, 리틀 헤이븐, 브로드 헤이븐_웨일스
아이들과의 한 달 여행 네 번째 목적지는 웨일스(Whales)였다. 웨일스로 여행 간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Why Whales?'였다. 심지어 웨일스에 도착한 후에도 현지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 웨일스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와 함께 영국을 구성하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의해 정복되었고 1536년 헨리 8세의 연합법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웨일스 고유의 언어와 문화가 억압되자, 웨일스 인들은 종종 자신들이 주변화되었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니 멀리 중국(한국)에서 영국의 다른 지역이 아닌 웨일스로 여행 온 나와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두 아들과 아내를 낯선 곳에 떠나보낸 후 혼자 남은 남편이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하던 중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웨일스는 뭐가 제일 좋아?"
"걷는 거."
아이들은 아빠의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했다.
"계속 계속 걷는 게 너무 좋아."
역사적인 유적지나 화려한 성 이름, 아니면 지역 축제 이름이라도 듣게 될 줄 기대했던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행 전 목적지를 고민할 때 웨일스를 떠올린 건 영화 '미 비포 유 (Me Before You)'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경관 때문이었다. 영화는 웨일스의 펨브룩셔 (Pembfokeshire)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데, 조용한 마을과 넓은 초원,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인상에 강하게 남았다. 막상 웨일스에 도착해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넓은 초원과 조용한 마을, 고풍스러운 성들을 감상했지만, 그것 때문에 웨일스에 온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빨리빨리'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느릿느릿' 걷기 위해 웨일스로 왔다는 아이들의 말에 동의한다.
웨일스는 인구가 적은 시골이 많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쉽지 않았다. 카디프 같은 도시를 제외하고는 우유와 빵 같은 기본적인 식량을 살 때도 최소한 한 시간씩은 걸어야 했다. 웨일스에 있는 동안 나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한 일은 걷기였고, 가장 즐거워한 일 역시 걷기였다.
카디프 시청 앞 잔디밭에 한가롭게 누워 오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고 멀뚱 거리며 서 있는 내게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누워 봐."
"옷이 더러워지잖아."
"괜찮아, 빨면 돼."
"저 사람이 찬 공이 엄마 얼굴에 떨어지면?"
"괜찮아, 내가 막아줄게."
나는 어쩌다 이렇게 '안 되는' 게 많은 인간이 되었을까. 누구보다 틀에 갇히는 걸 싫어했으면서, 누구보다 많은 틀로 나 자신을 구속하고 심지어 아이들마저 가두려고 하는지. 그래, 눕자! 아이들을 따라 조심스럽게 잔디밭에 누웠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풀 냄새와 흙냄새가 훅 끼친다. 바람 냄새와 햇살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몸속을 꽉 채우고 있던 분주함의 독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바쁠 것도 없고, 꼭 해야 할 일도 없다. 밤 9시 반은 되어야 해가 지니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 여유도 충분하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하나하나 만끽하며 천천히 걸었다. 모래장난도 하고, 냇가를 만나면 잠시 냇물에 발도 담가 보고, 놀이터가 있으면 잠시 놀다 가기도 하고. 웨일스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우리는 매일 걸었다. 해가 쨍쨍 날 때도, 흐릴 때도, 비가 쏟아질 때도 걸었다. 길을 잃을까 안절부절못하던 두려움도 며칠 지나자 사라졌다. 발길 닿는 대로 여유롭게 걸었다. 벽을 뚫고 자란 작은 풀꽃도 자세히 바라보고, 느릿느릿 걷는 달팽이에게 인사도 하고, 누군가 그려놓은 그라피티를 감상하기도 하고, 저 길은 어디로 향할까 궁금한 길은 직접 들어서 보기도 하고, 그림자놀이를 하기도 하면서.
2016년 BBC가 School Swap: Korea Style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웨일스와 한국 교육 시스템을 다룬 적 있다. 웨일스 남서부 지역인 세인트 데이비드 (St. Davids)에 있는 고등학생 세 명이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직접 한국의 교육을 체험했다. 그중 한 학생이 한국의 긴 수업 시간을 견디지 못해 하루 만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막상 세인트 데이비드를 걸어 보니, 그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언제든 바다에 첨벙 뛰어들 수 있는 여유를 아는 아이가 하루종일 쉴 새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스케줄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었겠는가.
웨일스의 매력을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여행자는 직접 두 발로 이 땅을 밟으며 그 모든 매력을 느껴야 한다. 푸른 언덕과 광활한 해안선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세상 끝에 와 있는 듯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분주함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연과 하나과 되고, 어느덧 나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느림의 미학을 맛보고 싶다면 웨일스만 한 곳이 없다.
왜 하필 웨일스야,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웨일스에서 일단 걸어 보라고.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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