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17
하늘은 가을처럼 높고, 맑았다. 구름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하늘이 시원해 보일수록, 체감온도는 불처럼 치솟았다.
상하이전시센터(上海展览中心) 안의 공기에는 책 냄새보다 기름 냄새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간식으로 파는 싸구려 소시지 냄새가 코 밑에 달라붙었다. 지독하게. 40%, 50%, 70% (6折, 5折, 3折) 할인 — 숫자들이 천장에 매달려 출렁이고, 책 사이사이에 묘비처럼 꽂혀 있었다. 부스마다 손님을 잡겠다고 목청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파도처럼 부서지고 밀려왔다.
'독자'로 들어섰는데, 어느새 나는 ‘소비자’가 되어 표류하고 있었다. 장터의 동선. 할인. 확성기. 그것들이 나를 소비자로 만들었다. 소음은 모든 문장을 씹어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녁에 있을 김초엽·천선란 작가의 강연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우 30분을 기다리지 못했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단 한 권의 책도 사지 않았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들고 간 책을 꺼내 들지 않았다. 책을 떠올리면 자꾸 소시지 냄새가 났다.
독서를 장려한다는 화려한 이벤트에서 내가 받은 메시지는 단 하나.
“사라. 더 사라.”
책값의 20~30%에 해당하는 해외배송비를 얹어가며 책을 사는 내게, 70% 할인은 당연히 매력적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사고 싶지 않았다. 읽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초대형 작가들의 강연을 눈앞에 두고도, 내 발로 그 기회를 차버렸다. 할인율 숫자들이 책을 떨이로 보이게 했다. 그런 책은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다.
많음이 신성함을 대체했다. 숫자에 눌려 책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문화산업의 완벽한 동선 — 입구에서 출구까지, 망설임 없이 최대 매출이 되는 길. 오늘의 도서전은 현실판 바벨. 모든 것이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는 곳. 책 한 권이 우주였던 나는, 도서전이라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별빛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도서전의 먼지를 털어내고, 소비자에서 다시 독자로 돌아와야 했다. 거대한 규모와 숫자 놀음 앞에서 질식해 가는 독자의 감각을 살려내야 했다. 나는 도서전 대신 나만의 독서전을 열기로 했다. 책상 위, 딱 한 권의 책. 한 잔의 맑은 물. 한 시간의 침묵. 침묵은 오늘의 최저가이자, 최고가다.
도서전만 탓할 게 아니었다. 연간 200권이 넘는 독서량을 150권으로 줄이자는 목표를 세우고도 몇 년째 지키지 못했다. 읽는 책의 가짓수를 줄이고, 한 권을 오래 붙들자고 다짐하면서도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 책의 수만 늘리고 있었다.
다독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었다면, 그다음엔 사유가 뒤따라야 한다. 하루 책을 읽었으면, 이틀은 걸으면서 그 책을 씹어 삼킬 시간이 필요하다.
당분간 신간 금지.
읽었던 책을 재독 하거나, 고전을 깊게 읽겠다.
절대 분량이나 숫자가 목표가 되지 않도록, 독서의 감각과 기쁨을 회복하겠다.
도서전 갔다가 괜히 책을 찢고, 펜을 꺾을 뻔했다. 책과 펜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숫자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생각하며
100일 챌린지 달성에 숫자 하나를 슬며시 더했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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