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을 때까지 싸우고 또 함께 해야 할 동반

100일 챌린지_Day 16

by 윤소희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걸 몹시 싫어했다. 수많은 책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니, 새로운 책을 읽는 데도 시간이 모자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오래전 읽었던 책들이 문득 다시 나를 찾아온다. 나이만 생각하면 앞으로 남은 독서의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데, 이상하게도 그 오래된 책들에게 손이 가고 마음이 머문다.


그중에서 <노인과 바다>가 있다. 처음 읽은 건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명작이자, 길지도 않으니 ‘꼭 읽어야 할 도서 목록’ 어디엔가 이름이 올라 있었다. 어린 내게 이 소설은 지루했다. 혼자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는 설정 자체도 심심했는데, 기껏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뜯기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는 결말이라니, 허무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흐른 지금, 이 소설은 내게 전혀 다르게 찾아왔다. 몇 달 전 버스 안에서 우연히 오디오북을 듣게 되었고, 운영하는 오프 독서 모임의 책으로도 선정되면서 다시 종이책을 사 읽었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으로 연결된 이수정 작가님의 북토크를 통해, 나는 <노인과 바다> 무료 강독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우연들이 이어진 건 <노인과 바다>가 나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과의 인연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진하게 다시 이어진 것이다.


놀랍게도, 노인에게 이름이 있었다. 산티아고라는.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의 <노인과 바다>는 망망대해에서 펼쳐진 모노드라마였지만, 지금의 나는 노인에게 마놀린이라는 소년이 있음을 안다. 바다에 혼자 나가 커다란 물고기와 사투를 벌일 때도, 상어의 습격을 받을 때조차, 산티아고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물고기에게, 상어에게, 지나가는 새들에게도 이야기를 건넸고, 바다와 끊임없이 소통했다.


1.png <노인과 바다>


초판본에는 노인의 작은 배와, 나란히 큰 물고기가 묶인 채 함께 가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물고기는 사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나란히 가는 동반이기도 하다. 글쓰기도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글을 쓰는 일은 늘 고독하고 마음대로 안 써질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죽는 날까지 나와 나란히 걸어줄 동반자, 나를 기억하고 지켜주는 존재.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총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로 인해 많은 비난도 받았다. 나는 궁금해졌다. 그에게는 노인처럼 마놀린 같은 존재가 있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이어 줄 소년, 혹은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 존재가 있었을까. 그래서 그는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걸까.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는 아직 그런 존재를 갖지 못했다. 내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내 제자라고 부를 사람도 없다. 나를 기억해 줄 누군가, 나의 글과 삶을 그대로 간직해 줄 이가 없다. 그렇기에 내 글은 나에게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글은 나를 온전히 기억해 주는 소년 같은 존재이고, 내가 아직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다리이다. 산티아고에게 마놀린이 있었듯,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도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한다.


다시 읽음과 다시 씀은 서로 닮아 있다. 반복되는 독서는 새로운 발견을 안겨주고, 반복되는 글쓰기는 나를 회복시킨다. 나 역시 홀로 바다에 떠서 내 능력으로는 버거운 상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내가 내 글을 데려가는 것일까, 내 글이 나를 데려가는 것일까.


배 안에서 노인이 혼잣말로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듯, 나 역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글 속에 담는다.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 혼잣말을 이해하고, 나를 기억해 주리라 믿으면서.


글은 나의 바다이고, 나의 소년이며, 끝까지 함께 하는 동반자다.





Weixin Image_20250814091511_404.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