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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배우고 싶은 건 결국 이런 거였다

100일 챌린지_Day 18

by 윤소희

불어나 독일어라면 모를까. 이탈리아어? 접점이 없었다.

핀란드, 웨일스, 프랑스, 독일,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그리스… 유럽 지도 위를 꽤나 찍었는데도, 이탈리아만은 피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피한 게 아니라 못 갔다. 이유는 좀 웃기다.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들이 여행 온 여자한테 작업 많이 건대."

남편은 단칼에 말했다.

"내가 같이 안 가는 이탈리아 여행? 절대 안 돼."

납득도 되지 않고 우스웠지만, 애정 표현이라 여기며 나는 이탈리아 근처를 빙빙 돌며 스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인문학자가 단테의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낭독했다. 한 단어도 못 알아들었는데, 그 울림이 나를 때렸다. 뜻도 모르는 소리가 내 안 어딘가를 건드렸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만 읽었던《신곡》을 나도 원어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 아주 막연하게 -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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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 시칠리아 여행


2023년 가을, 드디어 이탈리아 땅에 발을 디뎠다. 남편과 시칠리아 섬을 한 바퀴 돌고 로마에 들렀다. 시칠리아의 공기와 빛이 나를 건드렸다. 열망의 작은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그냥 관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돌아와서 바로 왕초보 이탈리아어 인강을 결제했다. 매일 30분, 알파벳부터 시작. 아기도 아닌데, ‘아’부터 배우는 내가 조금 웃겼다.


알파벳조차 읽지 못하던 내가 단어를, 문장을 하나씩 만났다. 아직 말하기는 꿈도 못 꾸지만, 쉬운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건 해볼 만하다. GPT로 레벨 테스트를 해보니, A 말에서 B 초반쯤. 초급과 중급의 문턱에 서 있다.


줌파 라히리처럼 이탈리아어로 책을 쓸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기처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동안, 늙고 뻣뻣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말랑해진다. 마치 오래 굶긴 식물에 물 주는 느낌. 죽을 날까지 새롭게 배울 게 있다는 건 꽤나 설레는 일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는데 금방 어떤 인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데도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 같은 느낌.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으면 날 채울 수 없고 내가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중


줌파 라히리는 이미 퓰리처상을 받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국가인문학메달까지 받은 작가다. 그런 그가 마흔다섯에 이탈리아어를 새로 배워, 그 언어로 책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정말 썼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책이 입은 옷》, 《내가 있는 곳》, 《로마 이야기》 … 그는 이탈리아어가 “무분별하고 말도 안 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고 했고, 그 열망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나는 라히리가 아니다. 언어 천재도 아니다. 이탈리아어로 책을 낼 계획도 없다. 그럼에도 낯선 언어가 주는 기묘하고 생경한 느낌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치 눈을 하나 더 갖는 느낌. 남녀 구분이 있는 단어를 만나면, 그 단어의 온도와 표정이 보인다. 복잡한 시제를 배우면, 예전에 하나로 뭉뚱그렸던 시간이 잘게 쪼개진다. 동사 안에 숨어 있던 행위의 질감이 만져진다.


낯선 언어를 배우는 건, 결국 내 취약함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일이다.

다시 아기가 되는 것처럼.

당연히 두렵고, 그래서 더 선명하다.


Io e l’italiano ci stiamo ancora conoscendo.
(나와 이탈리아어는 아직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다.)




Weixin Image_2025-08-15_102927_823.jpg 윤소희 작가_ 시칠리아에서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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