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20
사월이네 북리뷰의 유튜버 김규범 작가는 『감정을 살아내는 중입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 안은 내 감정이 드러나는 유일한 공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풀리듯 고개가 끄덕여졌다. 집 밖에서는 강한 척, 집 안에서는 괜찮은 척을 해야 했던 시간들. 운전석 안에 홀로 앉아 있을 때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 역시 차 안에서, 세상의 그 어떤 공간보다도 자주 나를 만나곤 했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던 날, 나는 가장 먼저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곧 면허증을 갖는 일이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아직 1단 기어밖에 배우지 않았는데도 늘 과속을 하던 나를 보며 선생님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럼에도 한 번에 합격하자, 그 놀람과 기쁨을 함께 나누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첫 직장 KBS 아나운서실.
시간을 지키려면 자차는 필수다.
상사의 그 말은 법 같았고, 나는 생애 첫 차를 몰고 그대로 출근길에 나섰다. 주차조차 못 하면서. 결국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대신 세워 달라고 부탁해야 했던 날, 나는 어른의 문턱에 선 초보 운전자였다.
어른의 삶도, 운전도 쉽지 않았다. 전봇대와 담벼락에 부딪히며 내 차는 금세 헌차가 되었고, 눈치 보며 차선을 바꾸다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다. 트럭 기사가 욕설을 퍼부으며 내 차를 주먹으로 내리칠 때조차 나는 담담히 상황을 설명했다. 그 순간 알았다. 화를 내는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평온을 유지하는 자가 이긴다는 것을.
운전은 그렇게 내게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었다.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길은 늘 낯설었고, 주차는 여전히 서툴렀다. 그러나 어디서든 차 안은 나만의 고독의 방이 되어 주었다. “도저히 나를 사랑할 수 없겠다” 싶은 날이면, 목적지조차 정하지 않고 달렸다. 길이 있는 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작지만 울어도 괜찮고, 소리쳐도 괜찮은 공간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내 삶의 위로였다.
차의 핸들을 놓은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베이징으로 이사를 갔을 때 번호판 추첨을 기다리다 차 없는 삶에 익숙해졌다. 필요할 때면 띠띠추싱(滴滴出行)을 부르면 되었고, 주차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운전을 내려놓자 오히려 자유를 얻었다. 길을 잃어도 괜찮았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헤매도 좋았다. 그저 몸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버스와 전철에서는 감정을 숨기곤 했다. 내 표정이 읽힐까 두렵고, 감정이 새어나갈까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위안을 얻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사람들, 무거운 표정 속에 담긴 사연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터질 듯한 내 감정은 오히려 정돈되었다.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고독은 필수다. 그러나 고독만으로는 글이 완성되지 않는다.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그 순간들을 내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 고독과 타인의 세계가 부딪칠 때, 감정은 단단해지고 문장은 힘을 얻는다.
나는 더 이상 길 위에서 운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이 위에서, 키보드 위에서 여전히 달린다. 글쓰기는 또 다른 운전이다. 목적지는 여전히 불명확하고, 내가 잘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모든 순간,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쳐가는 말들이 내 마음을 울린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으니까.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