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21
연달아 두 번의 부고가 전달되었다. 모두 친구들에게서 온 소식이었고, 부모상이었다. 이미 부모 네 분 중 한 분을 떠나보냈으니, 언제든 또 내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한 발자국 뒤에서, 때로는 문턱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처음 경험한 건 시어머니의 장례였다. 시신을 가까이서 본 것도, 차가운 피부에 손끝을 대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막상 장례식에서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조문객을 맞이하고, 절차를 챙기고, 수많은 결정을 재빨리 내려야 했다. 진짜 슬픔은 발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야 비로소 밀려왔다.
슬픔을 이겨낼 방법을 몰라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어머니가 쓰시던 방, 책상과 침대, 책장과 옷장, 그리고 냉장고. 남겨진 물건들 하나하나가 눈물의 기폭제가 되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문장을 찾았다. 어머니의 글을 읽고 싶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첩들, 반쯤 쓰다 만 노트들, 서랍 깊은 곳에서 꺼낸 작은 장부들.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읽는 동안, 나는 또다시 울었다.
가장 많은 기록은 요리법이었다. 가족이 건강하고 맛있게 먹기를 바라며 적어둔, 소박하면서도 세심한 삶의 지혜. 그다음은 성경 구절과 기도문들이었다. 가족의 구원과 안녕을 비는 기도, 교회와 나라를 위한 간절한 기도들이 수첩마다 이어졌다. 많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어머니가 한평생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가장 깊은 마음을 두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어머니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도 없었으니.
어머니와 나는 식구들이 아직 꿈속에 잠겨 있을 새벽에, 부엌 불을 켜고 나란히 서서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내가 싱싱한 채소들을 깨끗이 씻으면, 어머니가 가지런히 썰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와 빈대떡이 노릇노릇 구워지는 프라이팬 앞에서, 어머니는 늘 이야기를 해주셨다. 힘든 시절의 이야기 와중에도 놓치지 않았던 웃음들. 어머니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 어떤 비극도 웃음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 새벽의 웃음을 아직 잊지 못한다.
더 많이 여쭙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친정엄마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꼭 글로 남겨달라고. 나중에 내가 소설로 쓰겠노라며, 어쩌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던지면서.
글을 쓴다는 건 결국 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영원 속에 머무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글을 쓰려는 우리 모두는, 단순히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존재를 온전히 남기는 ‘증언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나는 두 가지 다짐을 했다.
하나는 언젠가 나의 자녀와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남긴 문장을 더듬으며 내 흔적을 찾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을 대비해, 지금의 글쓰기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내 존재를 남기는 방식이자 미래와 이어지는 다리라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또 하나는, 살아 있는 동안 나 자신의 이야기만을 남기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글이란 결국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증거이기에, 내 곁을 스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문장 속에 묻어 두고 싶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묻고 또 들어야 한다. 당신의 하루는 어땠는지, 지금의 마음은 어디쯤 와 있는지,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빛났는지. 그렇게 귀 기울이고 기록을 남긴다면, 누군가가 예기치 않게 떠나는 순간에도 남겨진 우리는 조금은 덜 아쉬워할 수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이야기가 또 남은 자에게 위로가 될 테니까.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가졌더 사랑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진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고 죽을 수 있네. ... 자네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어. 자네가 여기 있는 동안 만지고 보듬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글쓰기는 나의 기도이고, 나의 레시피이며, 내 사랑의 방식이니까. 언젠가 내가 떠나고 누군가 글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날 때, 내 이야기가 어머니의 웃음처럼 따뜻하기를.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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