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23
‘고3엄마’가 되었다. 연년생을 낳은 덕에, 2년 내내 고3엄마로 살아야 한다.
‘고3’이라는 지위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특별하다. 며칠 전 에어컨이 고장 나 수리를 요청했는데, 그 방이 고3학생이 쓰는 곳이라 하자 기사님은 더 서둘러 달려와 주었다. 교회 주보에는 수험생 기도란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1년 내내 아이의 이름이 거기 오르며 축복과 기도를 받는다. 다양한 단체 활동에서도, ‘고3이 있다’는 말 한마디가 모든 설명을 대신하는 일종의 프리패스처럼 작동한다. 일상의 많은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죄부를 지닌 신분증 같은 것. 고3엄마의 지위란, 사회 전체가 그 무게를 묵인하고 부여하는 일종의 특권이다.
정작 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고3엄마처럼 밤늦게 간식을 해 나르지도 않고, 아이 곁에서 함께 책상 불빛을 지키지도 않는다. 새벽형인 나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곤 한다.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고, 아이들 역시 내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타이틀이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입시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현실은 그 믿음을 끊임없이 배반한다. 고3아이도, 고3엄마도 ‘존재’를 망각하도록 강요받는다. 자기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기는커녕, 이미 짜인 선택지에 순응하도록 밀려간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현존재로서의 자기 가능성을 망각하고 존재자로 '퇴락'한다. “나는 내 기준이 있어요” 외쳐도,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익명의 틀, 사회가 정해놓은 견고한 틀이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카톡방 알림은 끊임없이 울리지만, 정작 “너는 무엇을 원하니?”라는 물음에는 아이도, 나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잡담과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간을 채운 채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고3엄마의 진정한 역할은 어쩌면 단순하다. 아이가 퇴락하지 않도록, 자기 본래성을 망각하지 않도록, 잠시 숨 쉴 여백을 마련해 주는 것. 막상 고3엄마가 되어 보니, 이미 나는 아이와 함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예정된 과정 속에서 정해진 속도로 밀려가며, 그때그때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춘다. 아이의 1년은 곧 나의 1년이 되고, 그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소멸해 갈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학년의 시간이 아니라, 현존재의 시간성을 압축한 한 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가능성을 품고, 과거의 던져진 조건 위에서 매일매일 선택하며 버티는 시간.
어쩌면 그래서 나는 100일 챌린지 같은 것으로 나를 몰아댔는지 모른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존재의 목소리를 되살려 낼 수 있으니까. 아이의 하루가 정해진 시험지 위에서 채워지는 동안, 나는 문장을 쓰며 그 틀을 넘어 존재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려고 발버둥 친다. 내 글쓰기는 나만의 저항이 아니라, 아이와 나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 서기 위한, 가장 은밀하고도 강력한 여백이다.
입시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시작을 위해, 나는 어떤 언어로 이 시간을 견뎌야 할까.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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