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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따뜻한 냉장고

죄책감 냉장고, 갈등 냉장고, 기억의 저편 냉장고

by 윤소희

견고한 줄 알았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건 처참했다. 전기가 나가자 영원히 차가울 줄 알았던 냉장고는 무력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야채들이 시들시들해졌고, 우유는 바로 버려야 했으며, 얼음은 녹아 물이 되었다. 고기에서는 핏물이 흘렀고, 생선들은 썩은 눈을 하고 축축 늘어졌다.


탈이 난 냉장고가 제 몸을 활짝 열고 속의 것들을 토해낸다. 미숫가루 한 주먹, 도넛 한 조각, 남은 밥 뭉치, 까맣게 되기 직전에 껍질을 까서 담아 놓은 바나나 조각들, 남은 국과 반찬을 담은 작은 통들. 냉동실 안에는 있는 줄도 모른 채 몇 달이고 방치되어 있던 것들이 그득했다.


그렇게 나는 당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 잊고 싶은 것들, 고민이나 갈등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냉동실에 넣고 문을 닫아 왔다. 그러면 냉장고는 그 모든 걸 말없이 차갑고 견고하게 얼려 주었고, 나는 까맣게 잊고 살 수 있었다.


냉장고.jpeg 남은 음식들을 마구 넣어두는 냉동실


덮어두고 싶은 죄책감과 갈등, 잊고 싶은 것들을 불평 없이 품어주던 냉장고는 실은 더없이 따뜻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부 온도를 차게 유지하기 위해, 정작 냉장고 자신은 끊임없이 프레온 가스를 덥혀 열을 내고 있었다. 냉장고는 어쩌면 인간보다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지 모른다.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음식들을 토하듯 뱉어내는 냉장고를 보니, 슬며시 등 뒤로 가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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