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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엄마는 기차를,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강으로

100일 챌린지_Day 96

by 윤소희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하던 중, 아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엇에 클릭되었는지, 아이는 마음을 열고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몇 달 전, 아이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다섯 시간 이상 달렸다고 했다. 햇살이 쏟아지는 길, 이름 모를 동네, 처음 본 강. 물빛에 하늘이 반사되고,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아이와 친구들은 스냅챗을 켰다. 한 친구의 휴대폰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추적 신호는 3, 4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남자의 집을 가리켰다. 아이가 찍어 온 영상은 마치 한 편의 범죄 추적물 같았다. 좁은 마당에 모인 아이들이 중년의 남자에게 혹시 휴대폰을 봤냐고 묻자, 남자는 모른다고 했다. 그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며 자전거를 만지작거렸고, 때로는 집안을 들락거렸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재차 묻자, 결국 남자는 체념한 듯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내주었다.


나는 흔들리는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모하지만 맑은 정의감, 위험을 가늠하지 못하는 순수한 용기, 그리고 서로를 위해 주저 없이 나아가는 우정. 그 순간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자기 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읽은 『심리학이 말하는 그리움의 힘, 노스탤지어』에서 ‘회고 절정’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청소년기에서 20대 초반 (12~22세)까지의 기억을 가장 선명하게 간직한다. 아이는 열일곱, 그 절정의 나이 한가운데에 서 있다. 가장 찬란하고, 동시에 가장 불안한 시절.


IMG_6429.JPG 홍경화 -『심리학이 말하는 그리움의 힘, 노스탤지어』


나는 부모로서 그 빛을 바라본다.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온다. 아이의 세계는 넓고, 눈부시며, 때로는 위험하다. 나는 그 빛 속으로 달려가는 아이를 응원하면서도, 그 발자국이 너무 멀리 가지 않기를 바란다. 남자가 혹시 칼이라도 꺼냈다면 어쩔 뻔했을까. 아이가 미리 허락을 구했다면, 나는 과연 보내주었을까. 수많은 말 중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던 중, 문득 그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열일곱의 나는 이름만 자율이던 자율학습 시간, 몰래 교문을 빠져나와 역으로 향했다. 생애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탔다. 창밖으로 낯선 들판이 흘러가며, 세상이 내 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이유도, 목적도, 계획도 없었다. 그렇게 닿은 강가에서 나는 오래도록 물결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강물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어딘가로 떠나는 기차의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강으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던 순간 개구리가 물 위로 뛰어올랐고, 그 바람에 나는 놀라 돌아섰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채웠다.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떠났을 때 느꼈을 감정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의 열일곱을 떠올렸다. 타인의 시선에 길들기 전, 맨얼굴의 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단지 젊음 때문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는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아 낯선 집의 문을 두드렸고,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 문장 속을 헤맨다. 아이가 찍은 영상처럼, 나의 글도 몹시 흔들리고 흐릿하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 내가 있다.


열일곱, 아이도, 나도 강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글쓰기는 그 강을 건너는 일. 망설임 끝에 첫 문장을 적는 순간, 나는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간다.




b05e4832950fe0cc03144bfceafb1808.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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