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빨간 줄 사이에서, 알을 깨는 중

100일 챌린지_Day 98

by 윤소희

강의가 시작된 지 5분, 10분… 아무리 기다려도 이수정 작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뉴저지의 아침이 그녀를 삼켜버린 듯했다. 나는 시곗바늘과 카톡 창을 번갈아 보며 마음을 졸였다. 시계는 내 심장과는 다른 박자로 움직였다. 참가자들은 조용히 기다렸고, 그 정적을 깨야 할 의무가 사회자인 내게 있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무한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글쓰기에 대해, 문장에 대해, 그리고 100일 챌린지에 대해.


‘혹시 대상포진이 심해져 강의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건 아닐까.’

그녀의 고통을 상상하자, 말들이 자꾸 끊겼다. 카톡 창에 남긴 말에는 여전히 아무런 답이 없었다. 거의 한 시간이 흐른 뒤, 포기하려던 찰나—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코 주변에 붉게 부푼 물집이 번져 있었다.

“서머타임이 끝난 걸 깜빡했어요.”

그 말에 모두 웃었지만,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그녀가 무사히 나타나 주었다는 사실이 그토록 고마웠다.


이수정 첨삭.png 이수정 작가의 글쓰기 강의


첫 번째 원고가 화면에 띄워졌고, 첫 문장 들여 쓰기부터 지적되었다. 빨간 펜이 원고 곳곳에 붉은 물을 들였다. 그 장면은 몇 해 전, 편집장의 빨간펜이 지나간 내 원고를 떠올리게 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원고가 붉은 바다로 변하던 순간. 문장은 도마 위의 생선처럼 썰려 나갔고, 장식처럼 붙인 수식어들은 모조리 도려졌다. 그때 나는 글이란 ‘쓴다’보다 ‘지운다’에 가까운 일임을 배웠다.


이수정 작가의 빨간펜은 단호하고 정밀했다. 모든 조언은 냉정했지만, 동시에 정확했다. 그 정확함은 상처를 주기보다는, 이상하게도 위로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비록 우리가 함께 본 원고는 내 글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모든 말이 내 문장들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문장을 끝까지 읽어주고, 가차 없이 칼질해 주는 경험. 그렇게 아프게 깨질 때, 문장은 새롭게 태어난다.


강의가 끝났을 때, 한국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수업, 모두 피로했지만, 그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빨간 줄이 그어진 문장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알을 깨는 중이었다.


100일 챌린지가 끝나간다. 100편 가까운 글을 매일 써왔지만,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글을 계속 써야 할까. 나는 평생 쓰고 싶은가. 그 물음 앞에서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수정 작가의 강의를 들으며, 내 문장들이 얼마나 미숙한지 깨달은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되살아났다.


두루뭉술하게 애정을 던지는 대신, 정확하고 정밀하게 사랑하고 싶다.




IMG_1829.HEIC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