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 『남아 있는 나날』
몇 년 전 처음 『남아 있는 나날』을 읽었을 때, 그리고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이 작품을 이렇게 정리해 두고 있었다.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온 한 남자가, 인생의 황혼에서 마주하는 뒤늦은 후회. 특히 영화를 본 뒤에는, 절제하다 놓쳐 버린 사랑의 이야기라고 믿었다.
이번에 이수정 작가의 강독을 앞두고 다시 소설을 펼쳤을 때, 이전에 크게 눈에 띄지 않던 단어 하나가 유난히 자주 눈에 걸렸다.
‘품위(dignity)’.
스티븐스는 끊임없이 품위를 말한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때도, 그가 붙드는 마지막 언어 역시 품위다.
그때부터 소설이 조금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감정을 억누른 한 인간의 후회담이 아니라, ‘품위’라는 개념 하나를 위해 삶 전체를 조직한 인간의 기록이 아닐까. 그렇다면 질문은 달라진다. 진정한 품위란 무엇인가. 그리고 스티븐스는 정말 품위 있는 삶을 살았는가.
이수정 작가의 강독을 들으며, 나는 이 소설이 얼마나 정밀하게 설계된 구조물인지 첫 페이지부터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어떤 문장도, 어떤 회상도, 어떤 이미지도 우연히 놓인 것은 없었다. 작가의 치밀한 설계로 세워진 건축물 같았다.
순간 새삼 깨닫는다. 혼자 읽는 독서는 나만의 틀을 만들고, 함께 읽는 독서는 내 구조를 흔든다는 것을. 내가 중요하다고 믿어 온 중심이 사실은 가장 안전한 해석이었음을, 그 안전함 속에 얼마나 많은 질문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타인의 눈이 정확히 건드려 주었다.
강독 말미, 예정보다 훌쩍 길어진 시간 끝에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내 인생에서 ‘낮의 잔재(Tagesreste)’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잔재를 남기게 만든 나의 오해는 무엇인가.
프로이트가 말한 ‘낮의 잔재’는 하루 동안 제대로 말해지지 못한 생각과 감정이 밤의 꿈으로 흘러 들어가는 통로다. 이 소설에서 그것은 스티븐스가 평생 보지 않고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남겨 둔 것들, 품위라는 이름으로 눌러 두었던 삶의 잔여들로 보인다.
“흔들려야 잘 살고, 잘 씁니다.”
이수정 작가의 마지막 말이 요즘 유난히 흔들리고 있는 내게 맞춤한 위로가 되었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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