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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18. 2020

멜랑콜리, 타자를 사랑함으로 느끼는 슬픔과 고통

<멜랑콜리 미학> - 김동규

오래전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은 후, 사랑 이야기를 쓸 때는 마치 백과사전을 참조하듯 그 책을 넘겨보고는 했는데. 

오랜만에 사랑에 대한 다른 참고서를 만났다. 


더구나 추억 속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소환해, 영화를 중심으로 사랑과 죽음, 예술과 철학에 관한 사유를 엮어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 _ 2000년 개봉 독일 영화


‘이유 없는 슬픔’과 ‘부끄러움 없는 자기 비난’이 북받치는 요즘, 내게 일어나는 현상만 보면 나는 멜랑콜리커(Melancholiker)가 분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결정적인 것이 부재한다. 

멜랑콜리가 타자를 사랑하여 자기 내부로 받아들일 때 가질 수밖에 없는 고통과 슬픔의 정조라고 할 때, 내게는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다. 

도대체 이 바닥난 사랑은 어디 가서 되찾아 올 수 있을까. 


'인간은 사랑과 죽음을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과 철학이 눈에 들어온다'는 저자의 말에 비춰 볼 때,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멜랑콜리 미학> - 김동규



 세상에 외로움만큼 무서운 것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타인과 함께하는 거래는 외로움을 가중시킨다. 


‘죽음을 향한 자유’가 자꾸만 나약한 자살로 귀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죽음을 향한 자유’… 죽음과의 대면 속에서 자유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자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그 이유를 사랑의 부재에서 찾고 싶다. 서양의 자유 개념에는 사랑이 빠져 있다. … 서양의 자유론에는 타자를 향한 사랑은 빠져 있다.


멜랑콜리는 창조적인 일, 곧 타자를 사랑하여 자기 내부로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타자를 길러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고통과 슬픔의 정조다.


인간은 사랑과 죽음을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과 철학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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