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_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사이토 마리코
1.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저 사람 역시 지금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하고 생각하고 있을 터이다.
무릎보다 높이 쌓인 눈, 사람이 가까스로 빠져나갈 만한 좁다란 길 양쪽에서 나와 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걸어가는 거다.
사람들은 언제 마주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시작됐는가? 하여튼 둘은 서로 다가간다. 지상에 단 둘이만 남겨져 버린 것처럼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 한사람이 빠져 나가는 동안 또 한사람은 한편으로 몸을 비키며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
그때 둘이는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것이 내 고향 雪國의 오래된 습관이다.
‘눈보라 속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온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마주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누가 먼저 길을 양보하느냐는 그때가 되어야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눈보라 속 멀리서 걸어오는 조선의 모습을 만났다.
아직도 같은 눈보라 속을 다니고 있다.
2.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教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 땅에 착지해 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하고 그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 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았다.
일본 시인 사이토 마리코가 한국어로 쓴 시다.
시인은 대학 때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해 31살에('91) 서울에 와 1년 반 동안 있다 돌아간 후 한국어 시집 <입국>을 냈다.
이 시에서 제목을 딴 은희경의 소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대신,
절판된 이 시집을 중고로라도 사 읽었더라면 하는 후회도 해본다.
‘눈보라 속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온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마주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누가 먼저 길을 양보하느냐는 그때가 되어야 알 수가 있다.”
저 멀리 존재를 인정했을 때 이미 마주침은 시작된 것.
어떤 모습의 만남이 될지는 그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