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암태도 '동백꽃 빠마'
신안에는 1004 개의 섬이 있다. 일주일 머무는 동안 그중 열 개 가까운 섬을 돌아보았다. 그 많은 섬 중에 암태도라는 섬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벽화 때문이다.
사실 벽화라면 식상해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작은 나라에 벽화마을이 100여 개나 있다더니, 한 달 여행 중에도 이미 여러 곳에서 개성도 의미도 없는 벽화들을 봤던 것이다. 여행 지도에 벽화가 표시된 그 섬은 그저 다른 섬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는 섬이라고만 여겼다. 심지어 이름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렇게 스쳐가던 중 벽화 마을도 아닌 단 한 점의 벽화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오래된 집 담벼락에 그려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웃고 있는 얼굴. 파마를 한 듯 부푼 머리는 자세히 보면 애기동백나무다. 나무는 담벼락 안 집 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실 벽화를 나무와 연결해 그린 건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어디선가 본 적도 있고. 하지만 그 벽화는 분명 뭔가 달랐다. 그냥 스쳐가려던 차를 세우고 그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을 오래 들여다보았고, 얼굴 옆 담벼락에 붙어 있는 문패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그림 속 두 주인공의 이름이자 집주인의 이름일 것이다. 아쉬워하며 그곳을 떠나면서도 하루 종일 벽화 속 이야기가 궁금했다.
예상과 기대는 적중했고, ‘동백꽃 빠마’라고 불리는 벽화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집은 그림 속 할아버지가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집이자, 할머니가 시집와서 지금까지 산 집이다. 다른 벽화마을처럼 맥락도 없이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얼굴이 그려질 뻔했던 자리에 할머니의 얼굴이 그려지게 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할머니의 얼굴이 다 그려지자 할아버지가 ‘내 얼굴도 그려달라’고 요구해 애기동백나무 한 그루를 급히 구해와야 했던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웃어보는 맑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며 잊힐 뻔했던 작은 섬을 기억하게 한 건 벽화, 아니 벽화에 담긴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가 몸이 떠나온 후에도 마음을 그곳에 머물게 한다. 이제 일흔아홉이 된 동갑내기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담벼락, 100 년도 넘었다는 그 집 담벼락이 오래 그리울 것 같다. 금세 흩어져버릴 시간을 이야기로 끌어모아 그 자리에 머물게 한 벽화가 탐이 나지만, 욕심난다고 훔쳐올 수 없는 그만큼의 중력을 그저 상상 속으로 가늠해 본다. 평생을 살아온 집 담벼락에 그림으로 남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평생 함께 자라온 나무를 사랑하는 아내의 머리 위에 얹어 주고, 겨울이 오면 아내 머리에서 붉은 꽃이 피는 걸 바라보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