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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07. 2020

찐득한 잠, 갯벌의 진흙을 닮은

길고 찐득한 잠으로 여독을 풀며

무엇이든 머리에 베면 금세 잠들고 푹 잘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푹신하든 딱딱하든 높든 낮든, 베개의 모양이나 질감이 잠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던 때, 베개에 까다로울 이유가 없었다. 


베개에 까다로워진 건 몇 년 전부터다. 언제부턴가 조금만 높은 베개를 베고 자도 다음날 목이 굳어 뻣뻣해지곤 했다. 심할 때는 목이 돌아가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고, 통증이나 마비가 어깨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오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얻은 목 디스크 때문일 것이다. 결국 누웠을 때 경추가 완만한 C자 형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기능성 베개를 사용하게 되었다. 목덜미선 지압부가 목을 부드럽게 받쳐 주고 옆으로 누워도 어깨가 눌리지 않는 베개. 


베개에 까다로워지니 잠자리를 옮기는 게 번거로워졌다. 여행할 때마다 고민하게 된다. 옷 몇 벌과 세면도구 등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 간단히 여행하기를 즐기다 보니, 커다란 베개를 들고 떠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베개를 챙겨 가지 못하는 여행지에서는 주로 타월을 돌돌 말아 목에 대고 자거나 아예 베개를 베지 않게 되었다. 몸에 맞지 않는 베개를 베고 잔 후 목을 못 움직이게 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베개를 베지 않고 자면 목이 뻣뻣해지는 건 막을 수 있지만, 불편함 때문에 잠을 푹 자지 못한다. 질 좋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여행이 길어지면 자연히 몸에 피로가 쌓이게 된다. 


며칠 전 긴 여행에서 돌아올 때도 그랬다. 한 달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다 집으로 돌아온 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미뤄두었던 잠을 몰아 자듯 잠에 빠졌다.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을 짊어진 것처럼 몸과 눈꺼풀 모두 무거웠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던 잠은 마치 여행 중 서해와 남해에서 숱하게 보았던 갯벌 위 진흙처럼 무겁고 축축하게 감겨들었다. 끈적끈적한 진흙 속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처럼 잠 속으로 자꾸만 가라앉았다. 


증도에서 본 갯벌


그렇게 며칠 진흙 같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벼워졌다. 잠이 찐득찐득한 갯벌의 진흙을 닮더니, ‘자연의 콩팥’이라고 불리는 갯벌의 정화 작용마저 따라 했던 모양이다. 화려한 색채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갯벌처럼, 그 잠에서 나는 어떤 꿈도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억을 못 한다 뿐이지, 꿈속에서 많은 일이 있었을 거라는 건 안다. 갯벌도 그랬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무죽죽한 진흙만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거나 눈치 채지 못했을 뿐, 그 속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었다. 농게나 밤게, 갈게 같은 작은 게들이 빠르게 기어 다니고, 다양한 모양의 조개나 고동도 볼 수 있다. 짱뚱어 같이 조금은 기괴하고 그래서 귀여운 생물도 만날 수 있었다. 


짱뚱어와 작은 게들


수많은 갯벌을 보고 돌아온 여행의 끝, 갯벌의 진흙 같은 잠으로 여독이 풀리고 조금씩 몸이 회복되었다. 이제 슬슬 잠으로 충전된 내 안의 검은 갯벌에 나가 봐야 하지 않을까. 조개를 캐고, 게를 잡고, 어쩌면 낙지를 건져 올릴 수 있을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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