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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17. 2020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얼마 전 로고테라피(의미 치료) 관련 책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시 떠들어 보았다. 


https://brunch.co.kr/@yoonsohee0316/315


내가 읽은 버전은 이시형 박사가 번역한 2005년 판이 아니라, 정태시 역의 1979년 판이다. 

부모님의 책장에서 처음 꺼내 읽었고, 아주 시간이 많이 흘러 심리학을 전공한 후에 다시 읽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_1979년 판 (좌) 2005년 판(우)


요즘 내 주위 사람들의 삶을 갉아먹는 고통은 무료함이나 지루함, 공허함, 열패감, 우울감 같은 것들이다. 

뱃가죽이 등에 가서 달라붙는 굶주림이나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 등 생존을 위협하는 고통보다 못한 고통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고통이란 크든 작든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가득 채우므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니체

심지어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내가 살아야 할 ‘이유’, 곧 삶의 ‘의미’가 있어야 삶을 견딜 수 있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살아야 할 이유도 자신의 존엄도 모두 사라지니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느새 두루뭉술해진 답을 꺼내 들고 오래 들여다 보고 생각하게 된다. 

잊고 있던 나의 이야기를 다시 가다듬으며. 



풍요로운 지적 생활을 누렸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 그러나 … 그들은 끔찍한 주위 환경으로부터 내면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자유가 있는 삶으로 도망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체질상 별로 튼튼하지 못한 죄수들이 건장한 체구를 타고난 죄수들보다 수용소 생활에서 더 잘 살아남은 패러독스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단 몇 마디의 농담에 인간은 그 구조상 다른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초연함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어설 힘이 생긴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는 있으나 단 한 가지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마지막 자유 - 즉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감정, 고통이라는 감정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못한다. (스피노자)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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