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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28. 2020

늦은 오후의 그림자

가장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늦은 오후의 삶

남쪽으로 난 넓은 창가에 앉아 그림자를 바라본다.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던 한낮의 햇빛도 시곗바늘이 몇 바퀴 돌자 이내 누그러졌다. 새카맣고 짱짱하던 정오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고 거칠게 짠 삼베처럼 성긴 그림자만 몸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뜨거운 햇빛과 싸우던 강인한 의지나 열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늦은 오후의 그림자는 빛을 온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적당히 교합하고 있다.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고, 가야 할 어딘가도, 빨리 해치워야 할 그 무엇도 없는 오후. 식은 국처럼 미지근한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본다. 풀칠이 잘못되어 떠 버린 벽지처럼 그림자도, 나도 끝내 착 눌어붙지 못하고 엉거주춤 떠있다. 떠버린 그림자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 떼어 내려다 관두었다. 설핀 그림자가 슬그머니 길어지며 몸피를 늘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기 때문이다. 흐릿하지만 확대된 그림자가 그제야 드러낸 가장자리의 섬세한 윤곽 같은 것들.

 

삶은 저물어가고 나는 점점 더 가장자리로, 끝자락으로 다가선다. 조금씩 흐릿해지고 조금씩 멀어지는 가장자리, 그 언저리에서 서서 미쳐 저물지 못한 마음이 저 멀리 따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뚜렷한 경계에 성벽을 세우며 짱짱하게 세상을 밀어내는 대신, 경계를 허문 흐릿한 가장자리에 서서 세상과 지나간 시간을 바라본다. 


늦은 오후의 삶이 비로소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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