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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13. 2020

우울증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

<한낮의 우울>-앤드류 솔로몬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도무지 혼자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정작 아무도 부를 수 없었다. 그저 오롯이 혼자였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걸 아는 데도 도무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누군가가 언제든 전화해도 좋다고 해준 말이 순간 떠올라서 전화를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붙들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그 어떤 감정도 언어화되지 못했다. ‘끄억끄억'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데, 온몸이 점점 경직된다. 특히 두 팔이 저려오면서 두 손이 점점 당나귀 발굽처럼 오그라들었다. 손에 마비가 와서 굽은 상태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채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잠시 후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뻣뻣하게 굽은 두 손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사업이 망한 것도 아니고,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감기 몸살을 일주일 넘게 앓고 있을 뿐이고, 마침 아랫집에서 공사를 시작했을 뿐이다. 드릴로 바닥을 뚫는 소리가 내 머릿속 뇌를 뚫는 소리처럼 들렸을 뿐이다. 


평온한 한낮의 풍경과 끔찍한 소음


작년, 윗집 공사 소음으로 반년을 시달렸다. 공사가 끝나고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코로나로 거의 9개월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 아랫집 공사가 시작되었다. 감기 몸살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어 어디 가서 소음을 피할 수도 없다.  


별날 것도 없는 사실을 열거하는데, 순간 집이 내가 싫어 못 견디겠다고 미친 듯이 발길질하고 있는데 달아나지도 못하고 발길질을 당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누가 여기서 나를 끄집어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주기만 한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도 나를 옮길 수 없다는 절망감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하필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어 잘 정돈된 풍경이다. 사진으로 찍는다면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오디오를 입힌다면 눈에 보이는 화면과는 모순된 지옥이 된다. 지금 내 상태가 꼭 그렇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고, 아이들은 몇 달 만에 학교에 간다. 그토록 원하던 혼자만의 공간과 자유시간도 얻었다.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은 온갖 소음과 괴성으로 북적거린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 기제이다*.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지내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요즘은 그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롭다. 내가 잃은 것을 정확히 느끼고 그것을 슬퍼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마치 팽팽하게 당기며 내 삶을 지탱해주던 끈 하나가 끊어져 나간 듯 슬픔이 그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슬픔은 상황에 걸맞은 우울함이지만 우울증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이다*. 


<한낮의 우울>-앤드류 솔로몬


눈부신 가을 낮, 두꺼운 책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마치 이 책이 내 우울이 우울증으로 그 경계를 넘어가는 것을 막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눈물이 나오고 있다는 건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눈물마저 말라붙어 무감각, 무감동, 무기력의 세계로 넘어가면 그땐 정말 내 힘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버둥거리게 된다.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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