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섞이다: '부패'될 것인가 '발효'될 것인가

껑위에런차관 (耕月人茶馆)

by 윤소희

16 섞이다: '부패'될 것인가 '발효'될 것인가

@껑위에런차관 (耕月人茶馆)



통영


-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택시에서 내려 위위엔(豫园:예원)의 상하이라오지에(上海老街)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했던 머리가 하얗게 텅 비어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자전거, 뿌연 매연과 담배 연기. 고수의 손이 머릿속에 쑥 들어와 뇌를 소매치기해 갔다. 위위엔은 ‘평안하고 기쁜 정원’이라는 본래 뜻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유월 내내
찬양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에밀리 디킨슨 ‘무명인’ 중


개구리 떼의 합창이 못 견디게 여겨질 때쯤 겨우 껑위에런차관(精月人茶馆)을 찾을 수 있었다.


차관.JPG 껑위에런차관 (耕月人茶馆)


고풍스러운 중국의 전통 음악이 흘러나오는 차관은 조용하다. 넓은 실내에는 명청대 양식의 낡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이 눈에 띈다. 한쪽으로 물이 흐르는 인테리어는 명청대의 수향 마을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차관 한편에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주로 주말에만 쑤조우(苏州)와 홍콩의 연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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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위에런차관 (耕月人茶馆)


창가 쪽으로 줄지어 난 작은 방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있다. 지후와 나는 창 밖 풍경도 볼 겸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한때 정치적 의사소통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더니, 모든 것이 낡고 색이 바랬지만 고요하다. 잠시 이곳에서 머리를 ‘평온하고 기쁘게’ 쉬고 싶다.


차관2.jpg 껑위에런차관 (耕月人茶馆)


드디어 주문한 정산소종(正山小种)이 나왔다. 투박한 나무로 된 다반* 위에 유리로 된 작은 다관**과 찻잔이 앙증맞게 올려져 있다. 차는 붉고 진한 호박 빛깔, 잘 익은 감의 짙은 주황 빛깔이 난다. 보통 잘게 부숴 티백으로 만든 홍쇄차(红碎茶)만 마시다, 직접 찻잎을 우린 정산소종을 마셔보니 향이 살아서 꿈틀댄다. 싱싱하다. 향긋한 과일향이랄까, 삶은 고구마의 달콤한 향이랄까. 잠시 차를 입에 머금고 눈을 감는다. 찻잎이 나고 자랐을 모든 과정이 맛과 향으로 고스란히 입 안으로 옮겨온다. 양분 많고 축축한 흙냄새, 맑고 시원한 바람 냄새,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 냄새, 가끔은 벌레와 짱짱하게 싸웠을 고통의 시간 냄새. 굳이 코를 찻잔에 갖다 대지 않아도 방안 가득 떠다니는 홍차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차를 삼킨 후에도 향긋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오래 감돈다.


(*다반: 다기를 올려놓는 쟁반

**다관: 차를 우리는 주전자)


차관4.jpg 정산소종(正山小种)


정산소종(正山小种)은 송백(松柏)나무 장작을 태워 연기로 그을리고 불에 쬐어 말려 찻잎에 향긋한 솔나무 연기 냄새가 배어 있다. 보통 홍차 하면 떠올리는 다즐링, 우바, 아쌈 등의 기원이 소종(小种) 홍차다.


세계 최초의 소종홍차가 만들어진 건 약 400년 전 명나라 말쯤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이산에서 대대로 홍차를 만들고 있는 장(江)씨 집안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명나라 말 장 씨 집안사람들이 차를 만들기 위해 생엽을 따다 막 가공장에 부려 놓았는데 북쪽에서 군대가 들이닥쳤다고 한다. 가공장에서 하룻밤 묵어가겠다는 군인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허락했는데, 다음날 군인들이 떠난 후 가공장에 가보니 생엽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벌써 불그스름하게 색까지 변해버렸다.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것이 불편했던 군인들이 생엽을 깔고 잤던 모양이다. 가슴이 철렁한 장 씨 가족들은 망쳐진 잎들을 수습해 소나무를 때고 그 연기로 말렸다. 시커멓고 송진 냄새나는 차를 그 마을에선 차마 팔 수 없어 멀리 떨어진 읍내에 가져다 팔았는데, 운 좋게 사가는 사람이 있었다. 1년 후, 그 차를 샀던 사람이 찻값을 몇 배 지불할 테니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장 씨 가족은 소종 홍차를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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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산(武夷山) 통무관(桐木关)


한참 무더위를 견디느라 찬 음료만 고집하며 냉기가 가득했던 속이 따끈한 홍차가 들어가자 스르르 녹아내린다. 홍차와 푸얼차(普洱茶:보이차)처럼 발효가 많이 진행된 차들은 따뜻한 성질을 띈다. 미생물들이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과정에서 유해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부패, 유용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발효다. 별안간 군인들이 들이닥친 것처럼 예상치 못한 일과 부딪혔을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저 부서지고 썩어버렸다면 ‘부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견디고 견디며 더 높은 곳을 향한 꿈을 잃지 않았기에 ‘발효’가 되어 고운 빛깔의 향긋한 소종 홍차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첫 잔은 방문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두 번째 잔은 우러난 차의 맛을 즐기고,

세 번째 잔은 옅어진 차 맛과 함께 돌아갈 준비를 하며 작별을 알린다더니.

옅어진 호박 빛깔의 홍차 잔을 들고, 마주 앉은 연인에게 건배를 청한다.


별안간 위기를 맞은 연인. 세 번째 찻잔의 옅어진 차 향처럼 조용히 이별을 고하고 낡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이 고통을 가슴에 품고 견디며 모두가 없다고 포기해 버리는 ‘영원’을 감히 꿈꿔 볼 것인가.

술보다 진한 차향에 취한 탓인지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기가 돈다.


깊어가는 가을,

함께 차를 마시는 그와 나


낡아지는가, 아니면 익어가는가.




위위엔(豫园)


와이탄 남단에서 걸어서 10분, 안런지에(安仁街)와 푸유루(福佑路)에 둘러싸인 강남을 대표하는 정원. 쓰촨성 관리 판윈돤(潘允端)이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는 개인정원으로 1559년부터 18년 걸려 완성했다. 강남 제일의 명석(名石)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유명. 주변에 특산물을 파는 상점, 뎬신(点心) 가게, 차관(茶馆)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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