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진빈관(瑞金宾馆)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여기는 단풍이 들었네.’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아기자기한 골목들과 고풍스럽고 개성 있는 카페들. 가끔 유럽에 와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프랑스 조계지는 걷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가을인 줄도 모르고 스치고 지나려 했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열린 대문으로 슬쩍 정원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뤼진빈관(瑞金宾馆) 대문 안으로 슬쩍 발을 들여놓았다. 매서운 추위 대신 아린 맛없는 설렁한 겨울 날씨 탓인지 상하이의 가을은 매년 짧게 스치듯 지나가곤 했다. 모두 설핏 물 드는 둥 마는 둥 그렇게 가을을 스쳐 보내고 있는데, 홀로 정원 가득 울긋불긋 단풍을 품고 있는 그 정원에서는 분명 바깥공기와는 다른 공기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흐르지 않고 멈춰버린 과거의 시간. 영국인 대부호 마리스(Maris)가 2,30년대에 자신의 저택으로 지었다는 뤼진빈관의 다섯 개의 별장과 그에 딸린 정원은 2,30년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황금빛으로 살짝 물든 너른 잔디 위를 대부호의 저택에 초대받은 귀족 부인처럼 걷고 있자니, 그곳에 그득 내린 가을이 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온다.
가을이 내린다. 유독 이곳에만 가을이 스치듯 지나치지 않고 깊이 스며들었다. 나무들이 온몸으로 가을을 받아내고 있다.
여름의 타는 듯한 태양 아래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눌 동안에는, 젊음의 상징인 잎파랑이들이 그 격정이 영원할 거라 여기며 깝죽댄다. 그래서 한여름 나무들은 그토록 짙은 초록빛이다. 태양의 온기가 식으면 찬 기운에 약한 잎파랑이들이 죽어버리고, 그에 가려있던 카로틴, 크산토필, 타닌 같은 색소들이 드러난다. 그들은 이 가을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봄여름 내내 잎파랑이 그늘에 묻혀 있다 그제야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단풍나무, 개옻나무, 붉나무, 화살나무의 붉은빛도, 은행나무, 칠엽수, 낙엽송의 노란빛도, 참나무의 갈색빛이나 거무죽죽죽한 회갈색도 마술처럼 한순간에 둔갑한 듯 내 눈앞에 나타나지만, 그들은 절대 느닷없이 나타난 게 아니다. 한동안 가려져 드러나지 못했던 본래 고유의 빛깔이었을 뿐.
나무는 살기 위해 나뭇잎을 버린다. 나뭇잎들까지 살리려다 엄동설한에 다 함께 말라죽을 수 있으니, 손가락들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한다. 아파도 버려야 하는 것들. 끝까지 붙들고 있었더라면 제 빛 한 번 반짝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손을 놓아버린다. 잔인하다. 아프다. 하지만 놓아주니 나뭇잎들은 그제야 진정한 자신의 빛깔을 찾아 반짝인다. 비록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 직전 ‘잠깐’의 시간이라 할 지라도.
"당신을 알기 전까지 연기는 내 삶에서 유일한 현실이었어요. 난 오직 무대 위에서만 살았죠. 그 모든 것을 진실로 여겼으니까요. (…) 나와 함께 연기하던 모든 사람들이 내게는 신과 같았거든요. (…) 오늘 밤 난 난생처음으로 내가 항상 연기해 온 공허한 연극이 알맹이가 없고 엉터리인 데다,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 난 무대가 싫어요. 내가 느끼지 못하는 열정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나를 불태우는 어떤 것은 흉내 낼 수 없거든요.”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
문장으로 숨을 쉬던 지후가 언제부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사랑 안에 잠시 머물고 싶다며 글을 놓아버렸다. 무대 위에서 빛이 났던 여배우 시빌 베인이 도리언 그레이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약혼한 후 첫 무대 위에서 빛을 잃고 무너져 내렸던 것처럼.
높아진 하늘 탓에 허허로워진 가슴 때문인지, 가을이 되면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곤 했다. 때론 진행 중인 사랑이 있었지만, 매몰차게 잘라내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맸다. 나 역시 살기 위해 잘라냈었다 말한다면 누군가는 내게 돌을 던질까? 나는 지루한 초록 일색에 치를 떨었고, 깝죽대는 잎파랑이들이 뿜어내는 초록의 권태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내 사랑을 죽였어요. 당신은 내 상상력을 자극했었지. 이제 당신은 내 호기심조차 자극하지 않아. 당신은 그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다고. (…) 당신에게 예술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
알아 잔인하다는 거. 하지만 네가 초봄의 단풍 빛깔을 잃었기 때문이야. 사랑도 젊음도 언젠가는 스러진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저 사랑의 온기에 취해 자기 빛을 집어던지고 그저 지루한 초록 일색으로 너무 오래 늘어진 탓이야. 저 나무처럼 이 가을을 온몸으로 받아내 봐. 가을의 고통이 온몸에 스미도록, 그리하여 너의 고유한 빛깔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하지만 내가 떨궈버린 나뭇잎들은 울긋불긋 아름다운 제 빛깔을 찾지 못하고, 검푸른 죽음의 빛만 띤 채 땅에 떨어져 버리곤 했다. 존엄이고 체면이고 없이 놓아버린 손에 매달리고 들러붙는 천박한 집착과 공포의 냄새를 풍기며.
그저 물과 양분을 거둔다고 아름다운 단풍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 위해서는 절묘한 균형을 이뤄내야 한다. 단풍은 자연이 빚어낸 하나의 예술이다.
1. 기온 - 10도 안팎의 선선한 기온이 아름다운 단풍을 만든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사랑의 온기가 필요하다. 뜨겁게 타오르는 격정적인 사랑을 퍼붓기만 하거나, 단번에 얼굴색을 바꿔 단칼에 내쳐버린다면, 상대의 고유한 빛깔을 찾아내는 데 실패할 것이다.
2. 일교차 - 단풍이 드는 데는 낮 온도보다 밤 온도가 중요하다. 하루 종일 일정하게 선선해서도 아름다운 단풍을 기대할 수 없다. 한낮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어두운 밤사이 매서운 찬바람을 견뎌야 비로소 아름다운 빛깔들이 드러난다. 추억의 온기를 기억할 수 있는 낮의 시간, 온기가 영영 사라진 듯한 차가운 밤의 시간이 교차해야 한다.
3. 수분 - 수분이 과잉 공급되면 단풍이 늦게 들뿐 아니라 색도 고르지 않다. 반대로 수분이 부족하면 단풍이 들기 전에 말라죽어버린다. 물을 줄 때는 찔끔찔끔 주지 말고 한 번 줄 때 듬뿍 주고 한동안 주지 말아야 한다. 사랑과 관심이 넘쳐도, 또 완전히 끊어져도 안된다. 한 번 줄 때 듬뿍 부어주되, 오래도록 목마름을 견디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4. 일조량 - 단풍을 위해서는 적절한 일조량이 필요하다. 그늘에 있는 나무는 아주 적은 빛으로도 광합성을 하기 위해 더 짙은 녹색을 띤다.
울긋불긋 단풍 든 나무들과 이미 낙엽을 떨궈낸 나무들, 끝까지 초록빛을 고집하는 나무들이 어우러진 뤼진빈관 정원을 거닐다, 그제야 왜 내가 놓아버린 잎들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땅에 떨어져 버렸는지 깨달았다.
‘빛’
그래 빛이었다. 수분과 양분을 줄이고 뜨겁던 온기를 거둘 지라도 빛만은 거두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랑의 끝맺음도 빛을 거둔 어둠 안에서 이뤄지면 안 된다. 빛 안에 머물 때, 나무에게 버림받은 나뭇잎들이 고통을 삼키며 자신의 고유한 빛을 찾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눈물도 빛을 받으면 반짝이지 않던가.
높고 파란 하늘에서 내려오는 가을빛을 받으며 피처럼 붉은빛을 토해내는 단풍 아래 잠시 고개를 숙인다.
잔인하다. 아프다. 하지만 처절하리만큼 아름답다.
뤼진빈관(瑞金宾馆)
상하이 루완취(卢湾区)에 있는 유럽풍의 호텔로 5개의 독립된 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인 마리스(Maris)가 지은 개인 저택이었으나, 막상 완공된 후에는 그곳에서 오래 살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에 국민당 총사령부인 리즈서(励志社)의 소재지가 되었는데, 당시 쏭메이링(宋美岭)이 자주 드나들었기에 소문에는 황진롱(黄金荣)이 쏭메이링의 생인선물로 이 건물을 사주었다고 전해진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 상하이를 방문하는 국빈들 접대에 이용. 장제스(蒋介石), 쏭메이링, 쪼우언라이(周恩来), 린뱌오(林彪)등이 이곳에서 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