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佘山)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지후가 떠났다. 모두가 '저 세상'이라 말하는 곳으로. 상하이를 떠나 한국에 와서 산 지 5년이 지나서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마주치고,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것을 쏟아내고,
빈 방에 불을 켜고,
아름다운 시 앞에 무릎 꿇고,
털끝 하나 닿지 않고도 안았으며,
돌아서고,
그리고 마침내 그는 죽음으로 그 방의 문을 잠갔다.
망설임 없이 상하이 행 비행기를 탔다. 삶이 힘들고 마음이 흔들릴 때는 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보라 했던가. 고개를 들기만 하면 늘 산에 가로막혀 답답한 한국과 달리, 상하이에는 산이 없다. 유일한 산이라고 할 수 있는 서산(佘山)도 해발 100미터가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이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훌쩍 하늘로 올라가버린 그와 겨우 100미터쯤 가까워지는 걸까?
드디어 서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서산(东佘山)과 서서산(西佘山)으로 나뉜 서산을 보자, 얼어붙었던 마음이 '쩍'하고 갈라진다. 서산은 본래 하나였으나 80년대 고속도로 건설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전에 여러 번 왔음에도 찢어진 산의 슬픔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었다.
동서산의 계단길을 서둘러 오른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꼭대기에 오른 듯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오도록 걸음을 재촉한다. 눈물조차 터져 나오지 못한 먹먹한 가슴을 안고 그저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새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남겨둔 것인지, 차디찬 날씨에도 붉은빛과 보랏빛의 이름 모를 작은 열매들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다. 역시 모질게 거두는 건 자연이 아니라 늘 인간이었다. 연리목(連理木)이 눈에 들어오자, 그만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부둥켜안은 듯 서로의 가지가 얽혀 있는 앙상한 두 나무 때문이었다.
동서산에 서서 서서산 위에 솟은 성당과 천문대를 바라본다. 본래 하나였다 해도 한 번 갈라지고 나니, 이토록 가까이 있음에도 가닿을 수 없다.
무작정 숨 가쁘게 올라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모든 걸 겪고, 모든 걸 알지만
여전히 고요하고 평온한 당신의 얼굴.
정혼한 남편에게 의혹을 사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 씨앗을 태중에 품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아프게 낳은 아들을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속에 십자가에 달아야 했음에도
여전히 고요하고 평온한 당신의 얼굴.
당신이 내 손을 어루만지고 따스한 온기로 안아주자
들썩이던 내 어깨가 가라앉고 가빴던 숨도 고르고 평온해집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을 잃어도 아쉽거나 두렵지 않은 상태, 그것이 ‘평강’이라지요?
성모자상 앞에 서 있는 나.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조각상일 뿐이라는 '산문적 논리’는 그저 차가운 냉기만 흘려보내지만,
나를 어루만지고 위로해주는 그 손길은 분명 '시적 진실’로 내게 스며든다.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신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미구엘 드 우나무노의 '신을 믿는 것’ 중
"그 약수를 떠다 먹이면 고치지 못한 병도 다 낫는다고 사람들이 떠들어댔지만, 그 모든 게 거짓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지. 내가 그에 대해 논문도 썼으니까. 그런데 내 아내가 아픈 거야. 의사들은 고칠 수 없다고 손을 놓고. 어느 날 그 약수를 뜨러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와 미신들을 세세하게 연구했던 어느 종교학자의 고백이 떠오른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귀의한 적 없는 나. 열정과 갈등, 온갖 불확실한 것들과 의심, 그리고 좌절과 처절한 그리움을 가슴 깊이 품고 있는 나는 그 누구보다 신을 굳게 믿고, 신에게 매달리고 있는 건지 모른다.
당신 앞에서 평강을 얻고, 다시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나를 이해하고, 내 영혼을 읽을 수 있던 한 존재의 불씨가 꺼져 이 세상에서는 사라졌다 하나,
그는 분명 여전히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읽고 있다.
찬란했던 순간을 붙들어두기 위해 죽음으로 잠가 놓은 방 안에서.
서서산의 대나무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나는 잃었으나,
잃지 않았고,
더 이상 외롭거나 두렵지도 않다.
물기 가득한 바람 한 자락이 슬쩍 건드리고 지나치더니 곁에 잠시 머문다.
서산(佘山)
상하이 유일의 산으로 해발 90m의 아담한 산. 상해국가삼림공원(上海国家森林公园)으로 되어 있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현대적 중국 최초의 천문대 서산천문대와 서산성모대성당을 볼 수 있다. 서산성모대성당은 1863년 예수회 신부님들이 지은 성당으로 여러 번 개축되었다. 1942년 대성당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0년대 문화혁명으로 본당 종탑의 철 십자가 끌어내려지는 만행에 시달렸으나 1981년에 미사를 다시 드리게 되었다.
서산성모대성당(佘山圣母大教堂)
1863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가 들어와 이곳에서 활동하다 1864년부터 짓기 시작해, 1942년 극동에서는 최초로 준대성전(Minor Basilica)급으로 승격했다. 예수고난주간과 부활절 기간에는 상하이에 있는 가톨릭교도들이 모두 남쪽 대문으로부터 산을 올라 대성당까지 올라간다.
-끝-
***픽션 여행기 <상하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여행기는 장편소설 <당신을 읽다>의 주인공 이솔이 쓴 픽션 여행기로, 소설을 함께 읽어야 스토리가 완전해집니다. 기회를 보아 <당신을 읽다>도 연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