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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Nov 03. 2020

'OO 없다'는 말이 사랑하는 이들을 죽이고 있다

효용과 가치에 관해

오늘 밤에 죽어버리겠다고 했다. 밤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이미 귀를 닫은 것 같아 마음이 다급해졌다. 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묻자 ‘쓸모없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답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왜 늘 ‘쓸모’와 ‘가치’를 혼동하는지 화가 났지만, 그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고아원 봉사를 몇 년째 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혼자서는 밥도 먹을 수 없고 배변도 해결할 수 없는 중증 장애아들이 있다. 아기처럼 작고 가냘픈 아이가 열여덟 살이나 되었다는 걸 침대 옆에 적어 놓은 생년월일을 보고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정도는 다 다르지만, 그 아이들을 돌보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어간다. 아이들은 저마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씹거나 삼킬 수 있는 능력이 다르고, 챙겨줘야 하는 약이나 처치들이 다르다. 모두 세심한 돌봄과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 매달 봉사를 간다 해도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저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자들을 위해 고작 점심 한 끼를 마련하고 과일이나 간식을 갖다 주는 것이 전부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 아이들을 돌보는 비용이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느냐고. 쓸모와 효용에 관한 질문이고,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중증장애아들을 돌보는 데 드는 시간과 수고, 약값과 치료비까지 보탠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그 아이들이 성인으로 자란다 해도 세상이 말하는 ‘쓸모 있는’ 일을 하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렇다면 같은 비용을 들여 더 많은 수의 정상아들을 돌보는 게 옳은 선택일까. 


고아원에서 매일 힘들게 돌봄을 제공하는 봉사자들에게 더 많은 수고비를 줄 테니 정상아들이 있는 고아원으로 옮기겠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거절할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아이가 웃으면 함께 활짝 웃는 그들은 돈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언어 장애로 나 같은 외부인은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의 소리를 봉사자들은 다 알아듣는다. 심지어 아이가 입을 열지 않아도 가슴으로 아이의 뜻을 안다. 노부모의 치료비로 빚을 지면서도 부모의 생명을 하루라도 연장하기 위해 기를 쓰는 자녀의 마음이 이와 비슷할까. 세상 어디를 가도 ‘쓸모’와 ‘효용’을 논하지만, ‘쓸모’라는 말이 그야말로 ‘쓸모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바로 '사랑'이 있는 곳... 


여전히 그의 ‘쓸모’에 대해서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가 쓸모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뿌리치려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그저 “네가 있는 게 그냥 좋다.”는 말을 겨우 전했다.  


다행히 그는 죽지 않고 조금 더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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