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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26. 2021

봄은 문득 오는 것이 아니라, 번지듯 천천히 스민다

삶의 봄날은 갔지만

봄은 어느 날 문득 오는 것이 아니라, 번지듯 천천히 스민다.  


어린 처녀의 잔머리 같이 잔뜩 흐트러진 나뭇가지에 연분홍과 노랑이 분출한다. 봄꽃들은 ‘화산 폭발’처럼 강력하게 빛을 분출하면서도, 여전히 꿈결처럼 몽롱하고 흐릿하다. 아직 겨울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아서일까. 온몸을 녹신하게 녹여주는 따스한 햇살 아래 꽃들은 저마다의 빛으로 공기 중에 번진다. 마치 파스텔로 그림을 그린 뒤 손가락으로 문지르거나 헝겊으로 닦아낸 것처럼.  


한창 젊을 때는 그런 뿌연 봄빛이 싫었다. 아기 풀과 여린 나뭇잎의 연둣빛, 일렁이는 아지랑이, 색색으로 피어나는 봄꽃에 어쩌면 그렇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까. 나 자신이 봄 자체였기에 그 모든 것이 군더더기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생의 가을에 들어서니 비로소 번지는 봄빛에 마음이 함께 일렁인다.  


나무 그림자들 사이로 힘껏 달렸다. 아직 멀리 있는 해가 길게 늘인 그림자를 통해 슬쩍 어루만진다. 땅 위에서 겨울을 난 낙엽들이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유난히 길고 매서웠던 겨울을 견디기 위해 비우고 또 비우느라 텅 빈 낙엽은 부서질 때조차 경쾌한 소리가 났다. 다 부서진 부스러기마저 다시 봄이 되어 태어나겠지. 


겨울을 견뎌내면 어김없이 봄이 다시 오는 계절의 순환과 달리, 삶의 사계에서는 가을, 겨울을 보낸다 해도 봄이 다시 오지 않는다. 내 삶의 봄은 이미 떠났지만, 대신 매년 맞이하는 봄기운을 내 안에 조금씩 담아둔다. 바위틈에 자라며 바위가 품고 있는 양분과 기운을 흡수하는 암차(岩茶)처럼, 봄의 빛과 온기를 한 방울 한 방울 받아 마신다. 암차에 바위 향이 배어들 듯, 내 삶에도 해마다 스쳐간 봄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그렇게 스민 봄빛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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