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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Nov 08. 2020

"네가 우리 집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이야"라는 말

잘 받는 것도 섬김

‘잘 받는 것도 섬김입니다' 


‘섬김’에 대한 공부를 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 이미 남편은 몇 달째 월급을 가져오지 않고 있었다. 남편 회사에 투자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에도 꿋꿋했던 내가 무너진 건 엉뚱한 순간이었다. 


우리 가정의 처지를 알던 나이 지긋한 선교사님 한 분이 생활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놓고 가셨다. 순간 눈물이 쏟아지는 데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으나, 그 눈물은 분명 감사의 눈물은 아니었다. “정말 왜 이러세요?”를 반복하며 봉투를 치워 달라고 한참 실랑이했다. 그동안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푸는’ 사람이었던 내가 ‘베풂을 받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봉투를 거절하는데 실패하자, 바로 교회에 찾아가 선교 헌금을 해버렸다. 겉으로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다’는 그럴듯한 포장이었지만, 실은 자존심이 팽팽히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 남편의 사업 부도로 갑자기 막막해진 한 이웃에게 나와 몇 사람이 돈을 모아 쌀과 함께 봉투를 전달한 일이 있었다. 그때 펄펄 뛰고 화를 내며 안 받겠다고 했던 그 이웃의 마음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나의 선한 의도가 그 이웃에게 폭력일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 이웃은 결국 그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중국을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사업 실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쥐어준 돈 몇 푼 때문에 중국 땅이 치가 떨리도록 싫어졌을 것이다. 


그 이후 섬기는 자리에 서면 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수혜 받은 자가 감사해주기 바라고 남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섬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대상을 선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베푸는’ 자의 우월감을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지혜 없이 ‘섬김’이 폭력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상대방이 원할 때가 아니라 내가 원할 때만 ‘섬김'을 던지고 있던 건 아닌지…  


언젠가 내게 맛있는 음식을 종종 선물해 주던 분이 말실수를 한 적 있었다. 

“우리 집 일하는 아줌마가 너네 집이 우리 집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이란다." 

순간 함께 있던 사람들이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활짝 웃으며 주는 음식을 감사히 받아먹었다. 그때 전혀 화가 나지 않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당시 고난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훈련을 호되게 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누가 무언가를 주거나 도와줄 때 겸손을 가장한 거절을 하지 않는다. 남이 나를 섬기도록 허락하는 건 나에 대한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섬김을 받는 것도 복종과 섬김이 전제된다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섬김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쉽지 않다. 뭔가를 받은 후 ‘빚진 감정’을 누르고 되돌려 주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뭔가를 주고 되돌려 받지 않기 위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용기도 지혜도 부족하지만, 오늘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가만한 손길'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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