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Dec 08. 2020

남편의 연애편지를 발견했다

비밀 없는 스핑크스

남편의 연애편지를 발견했다. 이사 준비를 위해 평소에는 존재조차 잊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먼지 속에 낡은 종이들을 접어 꽂아 둔 작은 상자가 눈에 띄었다. 손으로 적은 연락처들,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 오래된 전화번호들 사이에서 문득 낯선 이름이 보였다.  


편지였다. 대학노트를 찢어 쓴 편지 말미에는 남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고이 접어 간직해 둔 걸 보면 결국 편지는 그녀의 손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편지에는 연도도 날짜도 없었지만 ‘새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고민하며 세웠을 밤과 편지를 쓰며 맞았을 그 새벽을 가만히 상상해 본다. 그녀는 결국 받아 보지 못했을 그의 마음을. 


없애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다른 상자에 넣어 두었다. 편지를 버리려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했기 때문이다. 그의 손글씨와 젊은 날 그의 마음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겨 가슴 아파하는 절절한 사연이나 사랑에 빠진 남녀들이 몰래 주고받는 밀어 따위를 기대했던 나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래 머뭇거리다 점잖게 떠나보내는 이의 예의 바름과 아쉬움 같은 것뿐. 정작 남편은 ‘비밀 없는 스핑크스*’였다. 


질투 나는 대목을 발견하기를 정말 바랐던 걸까. 연애편지를 훔쳐보았음에도 남편의 비밀 같은 건 찾아낼 수 없었지만, 어쩌면 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음에 안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테니까.  


비밀의 방을 지키는 문지기임에도 정작 자기 자신은 비밀이 없던 스핑크스. 어쩌면 그는 그 자체가 ‘비밀’이었을 것이다. 호기심과 설렘으로 먼지 쌓인 낡은 문서들을 다시 뒤적인다. ‘비밀 없는 스핑크스’의 진짜 비밀이 여전히 궁금하기에.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 제목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날 문득 마주치고, 마침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