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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Dec 15. 2020

산만해서 죄송합니다!

산만한 이의 글쓰기

최근 끝낸 책들에서 밑줄 그은 문장들을 찾아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록해 놓으면 필요할 때마다 찾아 쓰기 수월하다. 하지만 문장을 하나 다 적기도 전에 나는 위챗(wechat) 창에서 누군가 해온 질문에 답을 하고 이모티콘을 날린다. 또 1,2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커피포트에 물을 담아 버튼을 누른다. 다시 책상에 돌아와 쓰던 문장을 이어 쓴다. 잠시 후 커피포트에 올려놓았던 물이 생각 나 더운물로 차를 우린다. 찻잔을 들고 책상으로 돌아와 다음 문장을 이어 쓴다. 문장이 채 끝나기 전에 갑자기 주문해야 할 아이 신발이 생각났다. 아침에 꼭 끼는 운동화를 신고 나가느라 절룩거리던 아이가 떠오른 것이다. 스마트 폰에서 타오바오(淘宝:온라인 쇼핑몰) 창을 열고 운동화를 검색한다. 신발장으로 달려가 아이 신발 사이즈를 확인한다. 신발을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후, 채 끝내지 못한 문장이 눈에 띄어 다시 노트북 위에서 손을 놀린다. 다음 밑줄 그어진 문장을 찾으려 책 페이지를 넘기다 시간을 보고 다시 주방으로 간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책상에 돌아왔을 때는 아직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한 차가 이미 다 식었다. 잘 담아두고 싶어 밑줄을 그었던 문장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 기록되기도 전에 종종 다른 일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신발 산다며 결제도 마치지 않았다. 


산만하다.  


‘산만하다’는 말은 말썽꾸러기 개구쟁이 사내아이들을 묘사할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다. 당연히 선생님에게 ‘산만하다’고 지적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행동파가 아니기에 내가 산만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 스스로도 ‘산만함’과는 거리가 먼 줄 알았다. 


조용한 데다 성적이 좋았기에 선생님들은 나를 모범생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는 늘 산만했다. 수업 시간에 껌을 자주 씹었다. 수업만 듣고 있기에는 지루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입을 움직이다가 선생님 고개가 내 쪽을 향하는 순간 ‘얼음’ 하며 껌을 입천장에 숨기는 놀이를 했다. 머리가 길었을 때는 이어폰을 가만히 끼고 요란한 음악을 듣기도 했다. 가방에는 매일 온갖 종류의 책과 참고서를 무겁게 챙겨 들고 다녔는데, 한 과목을 2,30분 이상 지속해서 공부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금세 싫증을 느꼈기에 얼른 다른 과목으로 바꿔 주거나 다른 놀이를 생각해야 했다. 그 버릇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해서, 하나의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돌려 읽는다.  


한 마디로 산만한 인간이다. 반복과 지루함을 잘 못 견디고 끊임없이 새로운 걸 하고 싶은 욕심이 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한 우물을 파라." 가장 지키기 어렵다고 여기는 명령이다.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지 못하고, 늘 새 우물을 넘봤다. 그나마 몇 년 다녔던 직장도 보면 새로운 일을 공급받을 수 있던 곳이었다. 방송국에서는 텀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캐스팅되었다.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의 디제이를 하다 예능 프로그램의 MC가 되고, 뉴스 앵커가 되었다. 컨설팅 회사에서는 몇 주나 몇 달 단위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스태핑 되었다. 보험과 증권 산업에서 물류나 식품 등으로 산업을 수시로 바꾸었다.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고 반복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9년 넘게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바로 글쓰기다. 돈도, 명예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이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 산만한 인간이 끊임없이 반복 또 반복인 글쓰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반복 속에서 새로워지는 나를 만날 수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 우물을 파지 못하던 내가 오래도록 한 우물을 파게 되어 다행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있다. 내 글이 나를 닮아 산만하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초고를 쓸 때는 신난다. 2,30 분이면 에세이 한 편은 뚝딱 쓸 수 있다. 문제는 퇴고다. 산만한 초고를 일관성 있게 가지를 쳐내고 다듬어야 하는 그 과정이 산만한 인간에게는 너무 고통스럽다. 


"그녀는 산만했다. 그것이 그녀의 고질적인 문제, 동시에 이수영을 들끓게 만드는 매력이었다." 


김사과의 소설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수영을 예술의 세계로 이끌고 시인이 되게 만든 건 ‘산만한 그녀’였다. 야생마 같은 에너지와 호기심, 창의력은 분명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산만한 그녀’는 결국 '예술가'가 아닌 '예술가의 보헤미안 친구' 밖에는 될 수 없었다. 


야생마를 쫓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야생마 위에 올라타고 길들여야 할 때.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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