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콰마린 & 이시스 찬가
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
나는 경배받는 여자이자 멸시받는 여자이니*
천상의 푸른빛.
옅은 하늘빛, 중간톤의 푸른빛, 맑은 날 투명하게 빛을 반사하는 부드러운 바다의 파란빛, 반짝이는 별빛의 푸른색, 투명한 바닷물에 반사된 하늘빛.
이시스 여신의 옷 빛깔이 바로 그 푸른빛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의상에 주로 칠해지던 라피스 라줄리의 강한 울트라 마린 블루와는 오히려 대조적인, 천상의 푸른빛.
주문한 물감들을 팔레트에 짜며 그가 한숨을 내쉰다.
로열블루, 컴포즈 블루, 터키시 블루, 마린 블루, 피콕블루, 블루 노바, 코발트 블루, 울트라 마린… 수없이 많은 푸른빛 물감을 브랜드별로 주문하고, 섞어도 보았지만 '천상의 푸른빛’은 아니었다. 태양빛이 구름에 반사되어 산란될 때 나타나는, 제우스가 이오와 사랑을 나눌 때 번지던 그 푸른빛. ‘천상의 푸른빛’이라고 친절하게 설명된 세루리안 블루 컬러의 물감조차 그 빛은 아니었다. 아니, 빛을 잃은 그 푸른빛은 천상의 푸른빛일 수 없다. 조각조각 흩어진 남편의 시체를 찾아 방방곡곡 미친 듯이 헤매다 시체를 복원하고, 죽은 남편과의 교합을 통해 아들을 얻는 ‘빛 가운데 분만하는 여자이자 결코 출산해본 적이 없는 여자**’가 갖은 고난 끝에 겨우 가닿은 그 푸르름의 실체는 오랜 시간 갈망해 왔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죽음도 불사하는 불멸, 영원한 젊음. 벌써 20년째 마무리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그림.
‘인어의 눈물’이고 ‘바다 정령의 보물’이라는 하늘빛이자 투명한 물빛의 보석을 겨우 손에 넣었다. ‘바다의 물’이란 이름처럼 바닷물처럼 투명한, 맑고 상쾌한 빛을 발하는 보석. 보석은 바다를 닮고 바람을 닮았다. 그는 어두운 작업실에서 좁은 틈으로 깃들인 빛에 보석을 비춰본다. 푸른빛과 무색의 투명한 빛이 보는 각도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신이 약속의 증표로 주었다는 무지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빛나는 돌을 꽉 움켜쥔다. 이것도 아니야. 하지만 차마 던져버리지 못했다. 돌을 손에 쥔 순간 잔잔한 바다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다니는 듯한 편안함을 느꼈던 것이다.
정말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보석의 주술적인 힘 때문일까? 다혈질에 신경질적이던 그의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다. 몇 시간 내리 작업하면 부옇게 흐려지며 침침해지던 시력도 많이 좋아졌다. 작업하는 그림에도 깊이가 더해졌다. 원수의 마음도 돌려 친구가 되게 해 준다는 보석의 힘 때문인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따뜻하고 원만해졌다. 항시 잔잔하고 부드러운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그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역시 천상의 푸른빛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그런 하루하루였다.
아름다운 연인을 끌어당겨 만나게 해 주고, 사랑에 빠지게 해 주고, 한 번 사랑에 빠지면 오래도록 유지시켜준다는 보석의 힘 때문일까. 어느 날 문득 그는 ‘천상의 푸른빛’을 보고 말았다.
톡톡톡.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잠시 문 앞에 멈추는 발걸음, 손을 더듬어 문을 여는 소리. 소녀가 작업실로 들어섰다.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하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소녀가 잠시 발을 멈추고 환하게 웃는다.
“아저씨, 굿모닝!”
“어, 이오 왔구나. 이오야, 잠깐만 거기 그대로 서 있어 봐.”
그는 서둘러 창가로 가 커튼을 최대한 걷어 빛이 소녀에게 비추도록 한다. 제 아무리 천상의 푸른빛이라 해도 빛이 가 닿아야만, 빛에 의해서만 비로소 펼쳐지며 깨어날 수 있다. 이오는 더 활짝 웃으며 자세를 고정하고 서 있다. 햇살을 산란시키는 무지개 빛 같기도 하고, 하늘의 푸른 별빛 같기도 한 이오의 눈동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푸른빛을 띠고 있다. 도저히 저 눈동자가 보지 못하는 자의 눈동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모든 빛을 너무도 맑고 투명하게 반사하기에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에 남아 있게 되는 걸까? 빛을 받아 잔잔한 바다처럼 물결치는 이오의 눈동자를 그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본다.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서로에게 선물 주기로 한 거 기억하세요?”
그는 천진하게 미소 지으며 묻고 있는 이오에게 다가가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잡고 구석에 놓여 있는 카우치로 안내한다.
“당연하지. 아저씨가 먼저 이오에게 선물을 줄게.”
이오를 카우치에 앉히고 그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이오의 목에 걸어준다.
“이건 이오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빛 아콰마린이야. 아니 이오의 눈동자가 훨씬 아름답고 신비한 푸른빛이지.”
“푸른빛… 푸른빛이라면 아저씨가 저 높은 하늘의 빛, 저 넓은 바다의 빛이라고 했던 그 색깔?”
“맞아. 하늘의 빛, 바다의 빛, 별의 빛, 그리고 이오의 눈빛.”
“아, 좋다. 고마워요, 아저씨. 근데 난 선물 못 준비했는데….”
“이오는 이미 내게 줄 선물을 가지고 있어. 아저씨한테 정말 줄 수 있는 거지?”
이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불멸을, 영원한 젊음을 선사할 푸른 보석이 드디어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 드디어 천상의 푸른빛, 이시스의 가슴에서 빛나던 그 별빛으로 20년을 기다려온 그림의 마지막을 갈무리하면 된다. 그는 떨리는 두 손으로 천상의 푸른빛 보석을 들고 창가에 놓여 있는 이젤 앞으로 걸어간다.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 앞에 두 손을 펼쳐 든다.
악!
악마로부터도 영혼을 지켜줄 수 있다던, 몸에 늘 지니던 보석을 소녀에게 주었기 때문일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두 개의 푸른 보석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평정을 잃은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한다. 대신 아콰마린을 목에 건 소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요히 누워 있다. 소녀가 누워 있는 카우치 밑으로 마치 이슬이 떨어지듯 투명한 소리를 내며, 붉은 피가 톡톡 떨어진다.
천상의 푸른빛이… 그 빛을 잃고 바닥을 구른다.
*<이시스 찬가> 중, 기원전 3~4세기경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
** 이집트의 어머니 신, 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