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Mar 26. 2021

함께 자라온 나무를 사랑하는 아내의 머리 위에 얹어

'동백꽃 빠마'_<여백을 채우는 사랑> 중

동백꽃 빠마*

 

벽화라면 식상해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작은 나라에 벽화마을이 100여 개나 있다더니, 한 달 여행 중에도 이미 여러 곳에서 개성도 의미도 없는 벽화들을 봤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그만 단 한 점의 벽화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오래된 집 담벼락에 그려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웃고 있는 얼굴. 파마를 한 듯 부푼 머리는 자세히 보면 애기동백나무다. 나무는 담벼락 안 집 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실 벽화를 나무와 연결해 그린 건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어디선가 본 적도 있고. 하지만 그 벽화는 분명 뭔가 달랐다. 차를 세우고 그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을 오래 들여다보았고, 얼굴 옆 담벼락에 붙어 있는 문패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그림 속 두 주인공의 이름이자 집주인의 이름일 것이다. 아쉬워하며 그곳을 떠나면서도 하루 종일 벽화 속 이야기가 궁금했다.  

 

기대했던 대로 ‘동백꽃 빠마’라고 불리는 벽화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집은 그림 속 할아버지가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집이자, 할머니가 시집와서 지금까지 산 집이다. 다른 벽화마을처럼 그 집 담벼락에도 맥락도 없이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얼굴이 그려질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군수의 제안으로 그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그려 넣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끄럽다고 사양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다 그려지자, 할아버지가 ‘내 얼굴도 그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 동안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웃어보는 맑은 웃음이었다. 

 

평생을 살아온 집 담벼락에 그림으로 남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평생 함께 자라온 나무를 사랑하는 아내의 머리 위에 얹어 주고, 겨울이 오면 아내 머리에서 붉은 꽃이 피는 걸 바라보는 건. 흩어져버릴 시간을 이야기로 모은 벽화가 탐이 나지만, 욕심난다고 훔쳐올 수 없는 그만큼의 중력을 그저 상상 속으로 가늠해 본다. 


*동백꽃 빠마 – ‘빠마’는 표준어가 아니지만, 암태도 주민들이 사용하는 입말체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사용


'동백꽃 빠마'_윤소희 <여백을 채우는 사랑> 중


독자 한 분이 멋진 동영상으로 편집해 선물해 주셨어요. 과분한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자의 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문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