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과오를 책망하지 마라

용서받지 못할 죄는 있는가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지난 과오를 책망하지 마라.


저,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씀인가요? 그런 말씀을 들으니, 이 노인네 조금은 희망이 생깁니다. 뭐 그렇다고 80여 평생 내 인생을 벌써 용서했다는 건 아니고요. 그저 이제는 용서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기대를 잠시 해봤다고 할까요.


평생 입밖에 꺼내보지 못한 내 죄과를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는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을 해 보지 못해 가족이나 자식 같은 존재가 없다 보니 팔순 때 잔치를 하진 않았어요. 근데 팔순이라는 게 지나면서부터 마음이 몹시 조급 해지더군요.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는 없지만, 죽음이라는 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교회도 다녀요. 어렸을 땐 부모 손에 이끌려서 뭔지도 모르고 다녔고, 젊을 때는 일부러 피해 다니기도 했는데, 어릴 적 주일학교 때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성경 구절들이 평생을 따라다닙디다. 거 참 성가시기도 하고, 가끔은 죄책감을 건드려 괴로울 때도 있어 벗어나려고 애를 썼어요. 근데 늘그막에는 어쩔 수 없구나 하며 제 발로 돌아가게 되더군요. 오히려 그 안에 있으면 마음이 그나마 편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교회를 다니고 있고, 남아도는 시간에 이것저것 봉사도 꽤 하다 보니, 사람들한테 칭찬도 많이 들어요. 혼자 조용히 살면서 자기 삶을 어려운 이웃에게 헌신했다고요. 그런 말씀 마시라고 사양하면, 겸손하기까지 하다며 칭찬이 더해집디다. 요즘은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요.


죽음이 다가오니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는가도 생각해 봤는데, 아직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실감이 나지 않고, 잘 모르겠어요. 이래도 저래도 그만이다 하는 생각. 어디로 간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런 생각들… 그런데도 굳이 내 죄과를 고백해야 시원해지겠다는 제 심보는 도대체 뭘까요? 어떻게든 ‘회개’란 걸 해서 죽을 때 천국 문을 넘어가 보겠다는 열망이라도 있다면 이해하기 쉬울 텐데, 꼭 그런 마음은 아니거든요. 근데도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던 성경 구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쩐지 ‘고백’ 뿐인 것 같아서… 이렇게 어렵게 말을 꺼내 봅니다. 당신은 어차피 제가 누군지 잘 모르시니까, ‘익명’의 힘을 빌어서요. 술기운을 빌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사실 교회로 돌아가면서 술은 끊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건 쉽더군요. 술 담배 끊고 교회 출석과 봉사 열심히 하는 순으로 천국에 간다면 거의 일 순위로 들어갈 텐데 말입니다. 허허.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며..." (레 18:17)


바로 이 구절입니다. 서른 이후 내 삶을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성경 구절은… 갑자기 당신 안색이 변하는 게 보이는군요. 역시 안 되겠죠. 이런 죄과를 고백한다는 것은…? 다시 입 다물고 찌그러져 조용히 남은 생을 사는 게 맞는 거겠죠? 이제 정말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한 번만 눈 딱 감고 들어주실 수는 없을까요? 도무지 이런 죄는 안 되는 건가요, 네, 네?


사실 전 억울합니다. 전 그런 극악무도한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을 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인의 딸과 그 엄마가 저를 범한 거란 말입니다. 이미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군요. 나 같은 인간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하는 쓰레기라고 여기는 거겠죠. 짐작은 했지만…


지난 과오를 책망하지 마라…?

웃기는 헛소리.


(짧은 콩트라 연결을 시킬 필요는 없지만, 이 글의 화자는 '침을 바른 새빨간 입술'의 화자와 동일인입니다. 물론 소설이라는 허구 속의 일이지만요.)

https://brunch.co.kr/@yoonsohee0316/598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