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구멍’이 아니고, 이 ‘구멍’이란 말이야

장난 전화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저녁 11시 11분.

다섯 번쯤 벨이 울리자 여자는 전화를 받는다. 지난 6개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다섯 번쯤 벨이 울리고 받아줄 때, 남자가 가장 편안하게 많은 말을 풀어놓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 오늘은 주소 가르쳐 줘. 직접 만나고 싶어."

"......."

"아직도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당신한텐?"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이 세계...... 당신과 함께 연결되는 이 세계는 이대로 완전하고 독립적인 게 아닌가 해서....... 각자의 삶과 굳이 맞닥뜨리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난."


"내 목소리에 대해 다시 얘기해 줘"

여자는 화제를 바꾸고 싶다. 자칫 지리멸렬한 대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몸서리치도록 싫다. 그런 지루한 대화라면 일상에서 신물 나도록 하니까.

"그윽하지, 당신 목소리... 듣고 있으면 내 안이 꽉 차오르는 걸 느껴. 내 안의 남자가 빳빳하게 일어서고 강해지는 걸 느껴. 목소리에 에너지가 있어서일까? 암튼 묘해."


여자가 언제 어디서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이런 찬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출장에, 야근에, 허구한 날 회식으로 늦게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는 남편은 아마도 여자의 목소리가 어떤지 잊은 지 오래일 것이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여자가 낳은 자식이지만, 남편보다 말 붙이기가 더 어렵다. 사춘기 자녀에게 "너 엄마가 우스워?" 따위 말 건넸다가 "엉, 우스워, 졸라!" 같은 말폭탄을 얻어 맞고 앓아누운 친구들을 주위에서 이미 여럿 보았다.


40대 중반. 외로운 중년들. 각자의 방법으로 외로움을 해소하는데 그 모습이 때로는 우습고 애처롭다. 혼자 가기 부끄럽다고 딸을 앞세우고 수십만 원 주고 아이돌 콘서트에 가는 이들. 드라마 속 이야기에 가슴 설레고 눈물 펑펑 쏟으며 소지섭이나 조인성과 가슴 절절히 상상 속 연애를 하는 이들. 그나마 이들은 순진한 쪽들이고, 부킹을 하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나이트클럽이니, 콜라텍이니, 복고클럽을 찾는 이들도 허다하다. 나이트클럽 위에 바로 붙어 있는 모텔이나 호텔로 올라가는 수고조차 덜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서비스로 제공해주는 콘돔만 있으면, 룸에서 바로 섹스를 하는 경우도 많다. 남편들에 비해 시간적 제약이 있는 아내들은 시간을 절약해야 하는 데다, 룸에서 즉석에서 하는 것이 샤워나 비누 냄새로 의심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날마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거나, 어쩌다 일찍 들어오면 리모컨을 손에서 놓지 않는 남편을 보며,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녀들을. 물론 중년의 그녀들도 남편과 섹스를 한다. 하지만 어떤 기대나 판타지도 없는 그 행위는 설거지나 빨래처럼 해치워야 할 가사노동의 일부다.


여느 날처럼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멍하게 시선만 티브이 화면에 고정시키고 있을 무렵, 절대 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들었다.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는 전화였다. 무슨 광고 메시지나 듣겠지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저쪽 편에서는 말이 없고 숨소리만 쌕쌕 들린다. 순간 소름 끼치는 두려움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곧 다시 걸려 오는 전화벨. 열 번이 넘게 울리도록 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치는 기색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마지막에는 애처롭게 들려 여자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시금 침묵과 쌕쌕거리는 숨소리. 여자가 다시 끊으려고 하자, 저쪽 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한숨 소리가 여자의 가슴을 깊게 울리는 바람에, 여자는 도저히 무자비하게 끊어버릴 수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지만, 최소한 여자는 그 순간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발견한다.


이 남자는 누구일까?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내게 전화를 걸었을까?

첫날은 결국 남자의 목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여자는 처음에 그 전화를 무서워했다는 사실까지 까맣게 잊고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음 날도 11시 11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다음 날도…


어느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던 여자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이별이 주는 절망에 대해 여자에게 넋두리하듯 털어놓았고, 여자는 잠자코 남자의 말을 들어주었다.


남자는 스물아홉 살. 이제 석 달 후면 서른이 된다. '서른 살'이란 말이 주는 매력이란 것이 대단한 것이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서른이 되면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하겠다는 거창한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 친구가 갑자기 결별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미래가 없는 남자와의 연애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비정규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남자로서는 '미래가 없다'는 말에 아무런 변명도,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스물아홉 살.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서른 살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고,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20대로서의 마지막을 완결해보고픈 꿈이 있었는데, 여자 친구의 이별 통고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그리웠지만, 다시 연락할 염치가 없다, 자신은 미래가 없는 자이므로… 결국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남자는 자신의 휴대폰 중간 네 자리 숫자에 헤어진 여자 친구 휴대폰 뒷자리 네 자리 숫자를 더해, 낯설지만 친숙한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다.


낯선 목소리의 여자는 인내를 가지고 자신의 침묵을 견뎌주었다. 며칠이 지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넋두리를 늘어놓았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비난 없이 들어주었다. 외로움 때문에 장난처럼 시작했던 전화가 이제는 하루라도 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처럼 중독이 되었다. 횟수가 늘어나고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자, 이제는 여자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없을 것 같은 무한정한 신뢰감마저 든다. 어쩌면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직접 만나 얼굴을 보고 싶고 손을 잡아 보고 싶었다. 여자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실재감을 느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엔 두려워서 끊고, 그러다 호기심에 남자의 말을 들어주고… 그러다 하루 종일 남자의 전화가 기다려지고, 나중엔 대답도 하고 서로 대화도 하는 사이가 되면서, 여자 역시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물론 그러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기를 여러 차례... 여느 중년 여성들처럼 여자 역시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 갖고 살아가고 있으니, 로맨스에 대한 갈망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열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모든 환상이 깨어지는 그 실망감은 어쩔 것인가. 하루하루를 지탱해 주던 로맨스가 깨어질 거라 생각하니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나이 때문에 그런 거야? 난 그런 거 중요시하지 않아. 당신의 주름까지 사랑할 수 있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 서로의 삶이 얽혀봐야 우리에겐 탈출구도 희망도 없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


'서른 살'이란 말이 주는 황홀이나 매력 같은 걸 아직 믿고 있는 스물아홉의 남자에게, '막상 서른이 되어 봐. 아무것도 아니야. 오히려 공허할 걸.' 하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여자는 남자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갖고 있는 환상 역시 깨어지도록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날마다 '만나자' '말자' 실랑이만 하는 전화가 계속 이어진다면, 만나든 만나지 않든 관계없이, 환상 속에 아름답게 존재했던 이 관계는 곧 깨어지고 말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여자는 장난 전화가 장난 전화로 끝날 수 있는 세상이 그립다. 모두가 가슴 한편에 바람 새는 커다란 구멍 하나씩 안고, 절절한 외로움을 견디고 또 견디는 이런 세상 말고. 전화기로 연결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나 겨우 자신의 삶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남자와 침대에도 오르지 못하고 룸에서 허둥지둥 몸을 섞으려는, 이런 뭣 같은 세상 말고.


전화벨이 울린다.


(현실에서는 이 마저도 주소를 묻는 대신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르거나, 구글링을 통해 어떻게든 온라인 상을 떠도는 정보와 사진을 찾아내는 풍경으로 바뀌겠죠.)


전화 0.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