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이유, 섹시하지 않아서...

섬세한 감성과 매너를 가진 '진정한 어른'을 그리워하며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죽고 싶다. 죽어버리고 싶다.
가족들만 아니면 오늘을 넘기기 전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수면제를 먹든, 전철에 뛰어들든…….

자살 이유,
섹시하지 않아서…….


스무 살, 막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싱그러울 그 해 여름.

그녀의 일기장을 채운 문장들은 색이 바래고, 말라비틀어졌으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스무 살의 그녀는 화장품 따위 바르지 않아도 뽀얀 피부에, 립스틱이 없어도 빨갛게 생기가 도는 입술, 사슴처럼 커다란 눈은 검은 동자가 유독 커 전체적인 인상이 선하고 한없이 순진해 보였다. 170에 가까운 큰 키에 호리호리하게 마른 편은 아니라도 팔다리가 늘씬했으며, 허리까지 찰랑이는 숱 많은 머리채까지 누가 뭐래도 '미인' 축에 드는 외모다.


그런 그녀가 대낮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고, 늘 사람이 없고 그늘진 곳으로만 숨어 다니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가 음식 먹기를 거부하다, 갑자기 폭식을 하고는 변기를 붙잡고 모두 토해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저 '반반한 얼굴에, 키까지 늘씬하니, 저 잘난 맛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나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때로는 좀 고깝게 보는 시선이 있을 뿐이다. 어쩌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관심을 표현한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적극적인 프러포즈마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차갑게 외면하기 일쑤였다. 자신이 못생기고 섹시하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갓 들어와 그녀가 천지분간도 못할 시절, 그녀에게 마수를 뻗어 그녀를 여자 친구로 사귄 남자는 그녀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사람이었다. 삼수를 해서 겨우 대학을 들어간 데다 군대까지 다녀온 뒤 대학원에 다니는 남자가 파릇파릇하고 순진한 신입생인 그녀를 사로잡았으니, 남자는 주위에서 '도둑놈'이란 소리도 깨나 들었다. 뭐 겨우 여덟 살 차이가 대수인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마흔과 마흔여덟, 아니 서른다섯과 마흔셋이라 해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차이는 무슨 차이' 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의 초반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나이 차이는 절대적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을 만든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스무 살과 재수, 삼수, 군대까지, 세상의 찌든 때 다 묻은 스물여덟 살 사이에는 분명 단순히 '여덟 살 차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남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거니까.


그런 남자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남자에게 코가 꿰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여자 친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가 인생을 알아?"로 시작하는 남자의 일장 연설을 듣다 보면, 8년이란 세월이 주는 그 무게감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이 든 남자 친구의 말이 진리인 양 믿고, 그의 말에 복종하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자기 주관을 갖고 사고하는 법이나, 독창적인 삶의 철학을 갖는 법 등을 한 번도 배워 본 일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대학 신입생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서너 달 잘 지내는가 싶었는데…… 여름이 되자, 무의식 속에 쌓여오던 갈등이 폭발하고 말았다.


무더운 여름이 왔음에도, 그녀는 고지식하게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긴 바지를 고집하고 있었다. 시원스레 허연 허벅지가 드러나는 핫팬츠나 미니 스커트도 좀 입어주고, 목덜미와 가슴이 훤히 드러나고 시원스레 긴 팔이 보이도록 민소매 티를 입어주길 바라는 남자 친구의 마음을 몰라주고. 물론 남자라고 해서 닳고 닳은 자기 또래 여자들을 선호한 건 아니었다. 속이 들여다 보이는 노골적인 유혹을 달가워하는 건 아니지만, 답답하리만큼 순진한 그녀에게 조급증을 느끼다 어느 순간 짜증이 확 났던 것이다. '이 어린것을 언제 키워 잡아먹나.' 하는 갑갑증이 어느 날 확 일었는지, 아니면 좀 덜 익었어도 그런대로 잡아먹어볼까 싶었는데, 그녀가 그 뜻을 몰라주고 협조를 안 했던 건지...


어쨌거나 무더운 여름날 오후, 남자는 그녀에게 평생 잊지 못할 한 마디를 던지고 만다.


넌 전혀 섹시하지가 않아.


그 순간, 그녀의 세계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드리웠으며, 드넓던 그녀의 우주는 쪼그라들고 위축되어 콩알만 해졌다. 그녀의 가슴에 '넌 섹시하지 않아'란 저주가 '콱' 박혀 버려, 그녀의 자존감을 잔뜩 구겨 진흙탕 속에 던져 넣고 구둣발로 마구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그날 오후,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약국 몇 개를 들어갔다 나오고, 전철역에서 들어오는 전철을 바라보며 발을 뗄까 말까 망설이기를 수십 번.


그녀는 죽지 못했다.


계속 살아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죽었다. 더 이상 파릇파릇 싱그럽던 스무 살의 그녀는 사라졌다. 물론 나이는 여전히 스무 살이지만, 찰나에 30년쯤 압축해 살아버린, 다 늙어버린 스무 살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마음 놓고 편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어둠과 그늘을 선호하고, 자신의 섹시하지 않은 몸뚱이를 얼마나 가릴 수 있느냐가 입을 옷을 고르는 기준이 되었다.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는 '비웃음'이 되었고, 그녀에게 보내는 시선은 '비난'과 '저주'가 되어 버렸다.


남자가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을 그 한 마디가 스무 살, 앞으로 살아갈 나날이 구만리인 그녀의 세계를 한순간에 닫아 버린 것이다. 이제 막 몽우리가 진 장미꽃을 보고, 빨리 활짝 피지 않는다고 꽃 모가지를 댕강 꺾어 버린 것이다.


이제 눈을 뜨려는 강아지, 막 꽃망울이 맺힌 꽃, 새 순이 돋은 나뭇가지, 움이 돋은 새싹.

여리디 여리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 어린 세계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섬세한 감성과 매너를 가진, 진정한 어른.


스무 살, 막 꽃망울이 지자마자 시들어버린 그녀를 생각하자,

'진정한 어른'이 몹시도 그리워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