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점쟁이의 예언을 반드시 성취하려고 애를 쓸까

'인생을 바꿔 놓을 남자'를 '이상형의 남자'라고 해석하는 건 자유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당신 인생을 바꿔 놓을 남자를 만나게 될 거야. 인생이 그 전과 그 후로 완전히 달라지지.


절망, 허무, 퇴폐, 회의가 지배하는 세기말이라 그런지, 그녀는 그 점쟁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그녀가 ‘수컷들의 난’이라 이름 붙인 것처럼 각양각색의 수컷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삶이 지긋지긋해졌기 때문이다. 스물여섯, 한창 벌들이 꼬일 때였다. 그녀는 예뻤고 이글이글하는 열정으로 뜨거웠으며,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김&장’에 다니는 멀쩡한 변호사 아들이 식음을 전폐하자, 그 변호사의 고상하고 능력 있는 엄마가 그녀의 상사에게 전화를 했다. 상사의 압력으로 그 아들을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그녀는 일부러 찢어진 청바지에 허름한 옷을 입고 맨 얼굴로 나가 줄담배를 피워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쓴웃음을 삼키며 순진한 변호사를 잘 설득했다. 평소 혐오하던 담배 연기와 친해지려고 애썼지만, 결국 우린 인연이 아니라는데 동의한 남자는 그래도 아쉬운지 꼭 연락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돈이든 법률적 도움이든, 무슨 일이든 필요하면 꼭 도와주겠다고.


그런 도움이 필요하게 될 날이 과연 올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짜리 몽땅해진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수컷들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몇 년 동안 소식도 듣지 못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먼 미국 땅에서 결혼이란 걸 한다고……. 말도 안 돼.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결혼을 한단 말이야? 가장 친한 친구인 나는 이렇게 홀로 내팽개쳐 두고? 학창 시절 서로의 러브 스토리를 속속들이 알던 친구의 결혼 소식에 그녀는 갑자기 우주를 떠도는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밤늦게 일을 마치고 회사를 나오려는데, 선배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주말 저녁에 혼자 뭐 하냐? 한 잔 할까?”

그게 누구라도 관계없었다. 그 저녁에는…. 우주에 버려진 고아가 된 그녀는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배와 단 둘이? 그건 좀 그런데...' 하는 그녀의 마음을 읽은 건지 선배는 급히 전화를 걸어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불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얀 고수머리를 하나로 묶고 온통 하얀 옷을 입은 새까만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막 잉카 제국에서 걸어 나온 인디언? 키가 작고 몸매가 아담하니 여성적인 데가 많아, 그녀가 평소 갖고 있던 수컷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단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해라. 남잔데 구역질이 나질 않네. 호기심이 일어난 그녀는 백발의 남자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지만, 백발의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대로 인디언? 그녀는 베일에 싸인 백발의 남자를 가슴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설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였다는 풍문이 있었지만, 그저 세상과 담을 쌓고 10년 이상 기타 줄 한 번 튕겨 보지 못한 은둔형 루저. 그녀보다 10살이나 많고 대학도 못 나오고, 집도, 차도, 통장도 그 무엇도 가진 것 없는 백발의 남자. 그녀가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나란히 선대도 그녀보다 작은 키까지…….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상대로 말이 안 된다.


혹시 이 남자가 ‘인생을 바꿔 놓을 남자’?

점쟁이의 말이 순간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이제 며칠 있으면 세기가 바뀐다. 시간이 없다.

머나먼 잉카 제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남자. 그 남자를 찾으러 가야 한다.


“이거 너 다 가져.”

옷, 액세서리, 구두, 가방, 책, 가진 모든 걸 던져 버리고 뛰쳐나가는 그녀. 그녀를 사랑했던 이들은 공항까지 따라 나와 눈물 흘렸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국을 떠났다.


마추픽추.jpg 마추픽추


발견될 때까지 수풀에 갇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고 오직 공중에서만 볼 수 있었다는 잉카 최후의 요새 마추픽추, 그 ‘잃어버린 공중도시’에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잃어버렸다. 주위를 빙 둘러 높이 솟은 절벽들과 천 길 낭떠러지. 그녀의 남은 삶을 기다리는 것은 그뿐이었다.


‘운명의 남자’를 드디어 찾았고, 점쟁이의 예언대로 인생이 180도 뒤바뀌었다. 그런데 그 삶이 정말 그녀가 원했던 삶일까? 왜 ‘인생을 바꿀’ 거라는 말을 당연히 좋은 방향으로 바꾼다고 해석하는 걸까? 아니 왜 점쟁이의 예언을 반드시 성취하려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는 걸까?


모든 것을 잃자 '마마보이 변호사'마저 그리울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더욱 깊숙이 숨기 위해 한쪽 묘지에 떼로 묻혀야 했던 처녀들과 노인들처럼 그녀는 그녀를 그곳에 묻었다. 한 세기가 스러져 가던 그때,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죽였다.


인연의 명령을 좇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대가로 얻은 죽음.

그때 문득 그녀 머리에 또 다른 점쟁이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이런 말들은 기억에서 쏙 빠져 버렸던 거야?


전생에 양반집 참한 규수였어. 그런데 그 집 머슴이랑 야반도주를 하네, 그 규수가. 에고,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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