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릴 수 없는 어떤 만남의 시작에 대하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바이올린 배우고 싶다고?”
열네 살이라고 들었는데, 키가 작아서인지 초등학생으로 보인다. 커다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내 눈을 바라보는 새미의 모습은 그야말로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아 그대로 무장해제되었다.
“네.”
피아노 앞에 놓인 의자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던 내 코앞으로 새미가 다가왔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딸기향이 훅 끼친다. 누군가가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까지 들이밀었다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피했을 텐데, 그 순간 나는 뒤로 얼굴을 피하지도,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새미에게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고 그대로 새미 얼굴을 바라보았다. 빨간 입술에 하얀 설탕 가루 몇 개가 묻어 있다. 방금 전 딸기 맛 사탕을 먹은 모양이었다.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새미 모습에는 퍽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입술에 사탕가루가 묻어 있네.”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속삭이며 손가락을 입술 가까이로 가져갔다. 새미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나더니, 혓바닥으로 아래 입술을 한 번 핥았다.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살며시 웃는데 왼쪽 입가에 작은 보조개가 팬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뭐하러 이곳에 와있는지도 까맣게 잊을 것 같아 황급히 말을 꺼냈다.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어깨받침을 바이올린에 고정하고 먼저 바이올린을 턱에 괴어 보여준다.
“이렇게 턱과 시선이 평행이 되도록 턱으로 잡아 주는 거야. 봐, 손으로 잡지 않았는데도 바이올린이 안 떨어지지. 새미도 한번 해볼까?”
왼쪽 어깨를 드러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며 길고 풍성한 머리를 뒤로 넘겨 보내려고 하는데, 딸기맛 사탕만큼이나 달콤한 샴푸 냄새가 훅 끼쳐 든다.
“새미야, 긴 머리카락이 방해가 되니까 당분간은 묶고 수업하면 좋겠는데…”
새미는 대답도 없이 갑자기 쪼르르 밖으로 나가버린다. 괜한 얘기를 한 건가. 잠시 후 새미가 숨을 헐떡이며 조그만 핑크색 머리끈을 내민다.
“좀 도와주세요.”
새미가 뒤로 돌아 머리채를 내미는 순간 당황했다. 두 손을 뒤로 내밀어 머리채를 움켜잡는데, 새미의 작은 손안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로 숱이 많다.
“제 손에 다 안 잡혀요. 어서요.”
나는 얼떨결에 고무줄을 받아 들었다. 한주먹에 버겁게 꽉 들어차는 풍성한 머릿결. 뒷목이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한 손에 잡아 고무줄로 묶어 주는데 뒤쪽 목덜미 왼쪽에 아주 작은 갈색 점 하나가 눈에 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긴 머리칼을 묶고 나자, 새미는 더 어려 보였고 얼굴이 작아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새미가 왼쪽 어깨에 바이올린을 받치고 턱으로 괴었다.
“잘했어. 그런데 비뚤어지면 안 되고 수평이 되어야 하거든. 턱과 시선이 일치되나 한번 봐.”
약간 틀어진 방향을 향해 있는 턱을 교정해 주려고 턱을 살짝 건드렸다. 그 순간 새미의 몸이 무너져 내리듯 턱에 괴고 있던 바이올린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순간 나는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다른 한 손으로는 새미를 잡았다. 바이올린과 나와 새미가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어서도 새미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몸을 뒤틀고 꼼지락거린다.
“가, 간지러, 워요!”
바닥에 떨어질 뻔한 바이올린을 잘 수습하고, 새미 몸에서 손을 떼고 새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린다. 아주 짧은 찰나의 접촉에도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몸 전체가 자지러지듯 반응하다니… 새미 몸 자체가 바이올린보다 더 예민한 악기다. 연주하고 싶다. 나도 모르게 끼어든 생각에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뭔가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듯 받아 든 바이올린을 끌어안 듯 안았다. 새미 몸의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지켜본다.
작고 비쩍 마른 몸매에 장난기 있는 표정 때문인지 첫인상은 중성적이었는데, 바로 그 중성적으로 보이는 몸이 사실은 바이올린보다 훨씬 섬세한 악기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일부러 새미에게서 조금 떨어져 선 채 바이올린과 활을 잡는 자세를 시범 보이고 직접 잡아 보게 했다. 처음 잡아보는 바이올린이 어색해서인지 새미는 살짝 벌리고 있는 입술을 혓바닥으로 자주 핥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고르지 못한 이가 슬쩍 보인다. 가지런하지 않은 이는 분명 아름답지 않았지만 새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 같은 묘한 매력이 있다.
“설마 손가락까지 간지럼 타는 건 아니겠지? 활을 그을 때 선생님이 새미 손을 같이 잡고 그을 거야.”
고개를 끄떡하느라 턱에 괸 바이올린이 떨어질 뻔했다. 새미의 빨간 입술 사이로 개성 있는 이들이 훤히 드러났다.
활을 쥐고 있는 새미의 작은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나이에 비해 작은 손이었지만 묘하게 어른스러운 느낌을 주는 손. 새미로서는 처음 긋는 활이니 내 손으로 반듯하게 그을 수 있도록 잡아주는데, 내 손안에 쏙 들어온 새미의 손이 꼬물거리는 병아리처럼 간지럽다. 손바닥이 간지럼을 타다니… 내게는 이런 섬세함이 없어, 연주가로서의 길을 진즉 포기하고 아이들 레슨이나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로 일찌감치 방향을 돌렸는데… 새미를 움켜쥐면 다시 가슴 떨리는 연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손안에 꼭 파묻힌 새미의 손. 함께 그은 활. 하지만 그 활과 현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는 분위기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덜덜덜 지지직.
혓바닥을 살짝 내밀어 보이더니 새미는 자신의 손을 슬쩍 내 손 안에서 빼낸다.
“혼자 해 볼게요.”
혼자 바이올린과 활을 잡고 현을 내리긋는 새미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여전히 매끄러운 소리는 나지 않지만, 나와 함께 그을 때만큼 덜덜거리지는 않는다.
“잘하고 있어. 그렇게. 손의 평형을 계속 유지하면서…”
바이올린 현 위에 활이 닿는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열심히 활을 긋는 새미. 아직도 남아 있는 아주 작은 설탕 가루 하나. 혓바닥으로 침을 바른 새빨간 입술. 그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슬쩍 보이는 고르지 못한 이.
그때는 몰랐다. 침을 바른 새빨간 입술이 내 삶을 얼마나 바꿔 놓게 될지…
(원래 단편소설의 일부라 미완의 느낌이 있지만, 나머지 글의 공개 여부는 아직 미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