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분명 거짓말이었다

사랑은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가

by 윤소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그가 돌아갔다. 겨우 이틀을 머문 뒤, 차창을 내려 조용히 손을 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데 눈이 시렸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여름이라 사람들이 북적대는 바닷가 대신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나 산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차 안에서 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고, 한밤중 근처 고속도로로 올라 속도계의 바늘이 미친 듯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깔깔거렸다. 차창을 열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소금기 많은 바람은 끈적했지만 속도가 높아질수록 시원해졌다. 한밤중 인적이 없는 바닷가 거친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주머니에 넣고 온 캔맥주를 꺼내 마시기도 했다. 그는 톨스토이의 흔적을 더듬어 갔던 러시아 출장과 며칠 전 돌아온 덴마크 출장 이야기를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저 하늘의 별처럼 아득했다. ‘칼스버그’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간, 내 심장은 이미 녹아 바닥에 줄줄 흘러내렸다. 상관 없었다. 그를 가까이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나를 보기 위해 달려와준 그를. 서울을 떠난 후, 두 달이 지나서야 나를 보러 와주었다.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열쇠가 열쇠 구멍에 들어가면서 내는 마찰음을 들었던 건, 막 졸음이 몰려오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꿈인가 하며 내 귀를 의심했고, 다음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벌거벗은 채 와들와들 떨었다. 눈을 꾹 감고 끔찍한 순간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돌리지 않고 스르르 열쇠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걷고 재빨리 현관 앞으로 달려가 잠금장치 옆의 보조 락을 눌렀다. ‘짤칵’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침대로 돌아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벌거벗은 채 새파랗게 질려 있던 남자도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옷을 입고 나자 남자는 더 이상 떨지 않았고, 대신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휴대폰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너무 놀라서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불속으로 휴대폰을 안고 들어가 허둥거리다 겨우 전원을 껐다.


“그냥 열어 줘!”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무릎을 감싸 쥐고 앉아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알려지고 결국 그에게 걷어 차인다 해도, 지금 이런 모습만큼은 절대 그에게 보일 수 없다. 남자의 모습이 드러난다면 밖에서 배신당한 그보다 안에서 배신을 행한 나 자신이 더 초라해질 것이다.

“도대체 난 너한테 뭐야?”

온몸이 차갑게 식는다. 또 그 소리. 지긋지긋하다. 절박한 이 순간에 그런 걸 또 따져 물어야 하는가.

“입 다물어!”

부글거리는 모든 독기를 끌어 담아 남자를 노려 보았다. 어쩌면 남자는 내 눈에서 살기를 보았을지 모른다.


“뭐하고 있었어?”

“응? 자고 있었는데…….”

“근데 왜 열쇠가 안 열려?”

“엉? 방금 열쇠로 연 거 아니야?”


나는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지만,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날이 밝아 오자 새하얀 내 시트 위에서 꼬불거리는 짧은 털 두 개를 찾아들고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털은 지나치게 구불거려 내 눈에도 혐오스러웠지만, 그걸 들고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이틀 동안 터질 듯 충만했던 가슴이 순식간에 황량해졌다. 그는 그가 채워준 것만 가져간 게 아니라, 본래 내 안에 있던 것들까지 싹 쓸어 가져 가 버렸다. 의도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으나, 그는 몽땅 가져갔다. 다시 텅 비어버린 자신을 다독이며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


1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내게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를 바라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도 부끄러웠다. ‘사랑’이란 말이 그의 아름다움에 흠집을 낼 것만 같아서… 그래서 여태 그 말을 속으로 아껴 두었다.


아름다운 것은 피할 수도… 가질 수도… 머물 수도 없다*, 고 하지 않았던가. 그를 마음속에 품으면 품을수록 고통에 숨이 막혀 오는 걸 알았지만 차마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아니, 언제 잡아 본 적이라도 있던가. 그는 그가 원할 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났다. 그가 찾아오면 천국에 들어선 듯한 열락(悅樂)을 느꼈지만, 그가 떠나고 나면 곧 온몸과 영혼이 금단증상에 시달렸다.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울부짖으며 애타게 그를 그리워했다. 시곗바늘은 배터리가 나간 듯 느릿느릿 움직였고, 내 맥박도 따라서 느려졌다. 안절부절못하며 한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하다가 운전을 할 때처럼 긴장해야 하는 순간에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다. 지방 발령 후 금단증상은 더 심해져 갔다. 자주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데려다준 건 남자였다. 핸드백에서 열쇠를 찾아 오피스텔 문을 열고,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나를 눕힌 남자는 그냥 돌아나가려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남자의 손길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냥 놔두었다. 몸뚱이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의식이 간혹 끊어졌다 이어졌다. 남자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간 후 거짓말처럼 깊이 잠들었다. 오랜만에 경험해 본 꿈도 없는 깊고 달콤한 잠이었다. 새벽 무렵 잠에서 깨었을 때, 남자를 붙잡고 울면서 그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후, 남자는 잠들지 못하는 나를 자주 찾아왔고, 남자가 들어왔다 나가면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도대체 난 너한테 뭐야?”


남자는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는 세상의 단 한 사람이다. 그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내 마음을 남자는 모두 들었으니까. 남자는 내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그를 존중해 주었고, 가만히 찾아와 내 몸만을 가졌다. 하지만 남자가 점점 고통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걸 안다. 자신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묻기 시작하면서, 남자는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룻밤에 수십 번을 일으켜 세워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도, 내 몸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멍을 남겨 놓아도, 내가 아무런 저항 없이 내 몸을 던져놓아도, 나를 가질 수 없다는 걸 남자도 안다.


그가 돌아가고 일주일이 지나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해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실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다. 휴대폰을 든다. 그에게는 걸 수 없지만 남자에게는 마음대로 걸 수 있는.

“지금 와 줘.”

난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휴대폰 저쪽에서는 조용히 들고나는 숨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가 잠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도대체… 난 너한테 뭐야?”

순간 욕지기가 솟아오르는 걸 꿀꺽 삼켰다. 잠시 애틋한 마음이 되었던 것마저 후회했다.


“사랑해.”

조용히 읊조리듯 말하는 내 목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휴대폰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 갈게.”


그건 분명 거짓말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