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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21. 2021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모든 게 너무 쉬워졌다

메이투안 앱 말고 배달하는 사람을 보니

모든 게 너무 쉬워졌다. 갑자기 필요한 게 생각나면 메이투안(美团:중국 배달 앱)을 열고 주문한다. 타이레놀 하나, 사이다 한 캔이라도 바로 배달이 된다. 심지어 새벽 서너 시에 주문해도 배달비만 조금 내면 바로 집에서 받을 수 있다. 24시간 영업하는 매장과 그 시간에도 배달을 하는 배달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외출하느라 아파트 단지 문을 나서다가 우연히 메이투안 배달원이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배달하던 물건들이 담긴 봉지가 찢어졌던 모양이다. 병이 깨져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바닥이 흥건히 젖었다. 깨진 병의 내용물을 자세히 들여다볼 마음은 없었는데, 배달원이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깨진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병에 한국 글씨가 쓰여 있는데요.” 

옆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영수증을 주워 확인하던 아파트 경비원이 끼어들었다. 

“깨진 건 싸오지우(烧酒:소주) 같은데요?” 

하필 배달 중 떨어져 깨진 병은 소주병이었고, 바닥을 적시며 흐르는 건 ‘참이슬’이었다. 


깨진 병이 한국 소주병이 아니었다면 자세히 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 거주하는 한국인이 적은 걸 알고 있어 더 호기심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소주병과 콜라병, 그리고 한국 과자 봉지들. 무심코 지나치지 못한 건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이고 아는 브랜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관련 없는 건 눈을 떠도 보이지 않으니까.


그제야 만약에 내가 시킨 물건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배달원에게 물어내라고 소리치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언짢음을 표현했겠지. 하지만 당황하고 난감해하는 배달원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저 배달원이 안쓰러웠다. 그 순간 ‘메이투안’이라는 실체가 없는 가상의 존재 대신 사람이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만 해도 ‘사선에서 선 100 명의 병사들 가운데 오직 15에서 20명의 병사들만이 자신이 지닌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 상황이라 할 지라도 자신과 같은 사람을 죽이는 데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버튼 하나만 가볍게 누르면 건물 하나쯤 통째로 사라질 수 있고, 누른 사람은 거부감은커녕 게임을 할 때처럼 쾌감마저 느낀다.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게 너무 쉬워졌다. 더운 날 에어컨 켜고 집에 들어앉아 아무 때나 필요한 물건을 시키는 사람들이 땡볕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배달을 잡기 위해 기다리는 배달원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가려 주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대신 휴대폰 안에 들어 있는 가상의 ‘앱’으로 바꿔 주었기에 가능하다. 전쟁을 게임으로 바꿔 주듯 사람을 지워주니, 모든 게 너무 쉬워졌다. 


깨진 소주병 앞에서 난감해하던 사람을 보고 난 후, 버튼을 누르는 게 아주 조금 어려워졌다. 


*데이브 그로스먼 <살인의 심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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