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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19. 2021

'윤슬'을 '윤슬'이라 부르지 못하는 마음

남용되면 아름다움은 퇴색한다

어느 날 문득 ‘윤슬’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예쁜 단어네. 더구나 윤슬을 찍은 사진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웠다.  


source: Pixabay


윤슬: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하지만 얼마 안 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새로 읽는 책이나 텍스트에서 ‘윤슬’이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이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마치 ‘윤슬’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이, 너도 나도 ‘윤슬’이라는 말을 썼다. 그야말로 ‘윤슬’이 난무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심지어는 아예 아이의 이름을 윤슬로 짓거나 자기 이름을 윤슬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사실 어느 날 문득 처음 눈에 들어온 단어가 그 후 계속 눈에 띄는 현상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임신한 후에는 어딜 가나 아기만 보이고, 이별한 후에는 사랑 노래만 들린다. 우리의 뇌가 세상을 한 번 걸러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정보만 떡하니 끌어다 놓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일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윤슬’은 좀 지나쳤다. ‘윤슬’이 동네 개들처럼 마구 짖어대자, 윤슬은 더 이상 윤슬일 수 없게 되었다. 슬프게도. 


윤슬은 삶에서 아주 간혹 마주치게 되는 반짝이는 순간을 담는 말이다. 거기에는 빛이 있고, 반짝임이 있고, 눈부심이 있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땅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너무 흔해져 버리자, 윤슬은 더 이상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는다. 


source: Pixabay


잔잔한 파도를 따라 일렁이는 빛의 물결. 끊임없이 흔들리며 반사되는 빛은 살아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기도 했다. 시간이 멈추면 반짝임도 멈출 테니까. 햇빛을 반사시키며 반짝이는 윤슬을 앞에 두고,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윤슬’이라는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하고. 남용되면 아름다움은 퇴색하니까. 


'윤슬'을 '윤슬'이라고 부르는 게 어때서… 이건 웬 심술일까.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는 이름은 뛰어난 이름이 된다. 유명해진다는 건 '개구리처럼 요란한 일'*이긴 해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입을 다문다고 소중함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내가 이렇게 '윤슬'을 남발하고 남용해버렸다, 이런! 


오랫동안 쓰지 못하고 담아 두었던 '윤슬'을 토해내고 나니 시원하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무명인' 중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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