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Sep 15. 2021

반짝이던 시절에는 늘 곁에 '밴드'가 있었다

'밴드'를 처음 만났을 때

“저, 드럼을 배우고 싶은데요.”


창문에 붙은 드러머의 사진을 보고 홀린 듯 실용음악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누군가는 피식 웃었다. 그때 나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드럼을 연주하려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쩍벌남’ 자세) 두 발과 양손을 모두 써야 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드럼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던 남자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말리지 못했던 것이다. 한번 해볼까’로 시작한 일인데, 어쩌다 보니 벌써 밴드를 몇 개나 거쳐 온 ‘20년 넘는’ 경력의 아마추어 드러머가 되어버렸다. (물론 중간에 공백이 더 큰 경력이지만)


당시 나는 막 로또에 당첨되자마자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 같은 심정이었다. 대학 졸업식도 하기 전에 꿈의 직장인 KBS에서 아나운서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기쁨은 잠시뿐, ‘순환근무제’라는 제도 때문에 입사한 지 반년만에 연고도 없는 부산에 내려가 살아야 했다. 직장동료와 가족, 친구, 심지어 막 사귀기 시작한 남자 친구까지 남겨두고 부산으로 떠나는 심정은 참담했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프로그램을 맡아 방송을 했지만, 방송 사이사이 그 잠깐의 공백이 두렵고 싫었다. 


드럼이 그 공백을 메워주었다. 팔다리를 따로 놀리는 게 어려웠지만, 빨리 배워 남들 앞에 보여주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드럼은 기타나 피아노처럼 홀로 공연하기에 적당한 악기가 아니다. 아니 공연을  하든 안 하든,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밴드가 필요하다. 학원 등록을 하자마자, 그해가 가기 전에 공연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놓은 상태라 밴드를 만드는 게 시급했다. 방송국 안에서 음악에 관심 있어 보이는 선배 PD와 동갑내기 MD*를 설득해 즉흥적으로 3인조 밴드를 만들었다. 


밴드 이름은 Y-NOT.  

왜 안 돼? 당연히 할 수 있지!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거라 했지만, 우리는 약속대로 그 해가 가기 전 카페 하나를 빌려 콘서트를 열었다. WHY NOT? Nirvana의 Smells Like a Teen Sprit, Deep Purple의 Highway Star 등의 외국 록뿐 아니라, 서태지와 자우림 등 한국곡까지 15곡 정도를 연주했다. Y-NOT 정신에 충실히 입각해, 짧은 원피스를 입고 드럼을 연주했다. WHY NOT?


좋아하는 음악을 합주하고 공연이라는 목표를 함께 달성한 것도 좋았지만, 사실 밴드는 낯선 땅에서 내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 아니 모든 것이었다. 밴드와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멋진 풍광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6밀리 카메라로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도 밴드 멤버들에게 배웠다. 밴드는 그야말로 삶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지경을 넓혀 준 스승이었다. 밴드가 없었다면 외롭고 힘들었을 낯선 땅에서의 삶이 밴드로 인해 '내 생애 가장 찬란한 시절'이 되었다. 


돌아보니 삭막하고 어둡던 시절에는 밴드가 없었고, 반짝이던 시절에는 곁에 밴드가 있었다. 

젊은 시절 낯선 땅에서 그렇게 밴드를 처음 만났고, 이제 '밴드 없는 삶'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MD (Master Director): 방송국에서 방송 편성 및 송출 업무 담당자

매거진의 이전글 밴드에서 중요한 건 음악 실력이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