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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Sep 25. 2021

'누나'라는 말에 발끈하지 말고 '진짜 누나'가 되자

제대로 어른 되기

아파트 단지 문 앞을 지키는 바오안(保安:경비원)이 얼마 전부터 나를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사온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성격 탓에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내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듯 질문을 하기도 했다. 

“또 봐요 是'再见', 是吧? (‘또 봐요’가 헤어질 때 인사 맞죠?)” 

순간 머릿속에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안녕’ ‘잘 가’ ‘잘 있어’ 등 많은 인사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맞다고 해주었다. “또 봐요”라는 말을 실제로 써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기분 좋은 인사말 같아서...  


사실 처음 그가 “누나”라고 불렀을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 나이는 생각도 않고 당연히 “누나”라고 부르는 것에 발끈했던 것이다. 언젠가 기사에서 한국 아파트 경비원 평균 나이가 63세라는 걸 읽은 적 있는데, 중국은 대부분 2,30 대 젊은이들이다. 그러니 굳이 내 나이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남편 말마따나 “아줌마”라고 안 부른 게 어딘가.  


사실 ‘누나’라는 말이 감정을 건드린 건, 젊은 시절의 어떤 추억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 어린 남자가 연애를 걸어온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들의 말은 한결같이 달콤했다. 아마 '닭살이 돋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스한 봄빛이나 폭신한 뭉게구름, 파스텔 톤의 은은한 반짝임… 달콤한 연애가 행복을 장담해 줄 듯 나를 유혹했지만, 그때마다 단칼에 거절하고는 했다. ‘누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돌봐주고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싫었던 것이다. 남편을 자주 ‘오빠’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는 순간 마법의 버튼이 작동해 많은 어려운 일이 순식간에 해결되는 걸 보면 ‘누나’나 ‘오빠’라는 호칭은 분명 어떤 책임감이 들어 있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다지만, 이 나이를 먹고도 ‘누나’라는 말이 듣기 싫다니. 나는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걸까. 주름이나 흰머리 따위로만 그 많은 나이를 먹었단 말인가. 


‘몸은 늙었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이 있다. 육체나 지능은 점점 노쇠해가지만 감성은 오히려 섬세해지는 노년의 특성을 표현한 말이다. 모든 기능이 약해지는데 오히려 감성이 살아나는 건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노년의 섬세함이 열여덟 살 소녀인 양 착각하며 우쭐하라고 주어지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과 필요를 세심하게 읽어내고 따스한 배려를 할 수 있는, 품이 넉넉한 어른이 되라고 주는 노년의 선물일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부담이나 책임은 싫다고 발끈하는 그런 마음이라면 차라리 몸과 함께 폭삭 늙어버리는 게 낫다. 


“누나”라는 한국말이 들리자, 고개를 번쩍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함께 환하게 웃다 보니 기쁨을 선물로 받은 듯했다. 나보다 훨씬 어린 그가 내게 ‘오빠’ 노릇을 한 셈이다. 이제 ‘누나’라고 굳이 불리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챙기고 토닥일 수 있는 ‘진짜 누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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