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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18. 2022

사춘기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부모가 할 일

나만의 내러티브, 이야기의 힘

아이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 추워!”하면서 태권도장에 갔다 집에 들어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관장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이가 '왜 수업에 오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관장이 아이를 세심하게 챙기지 않는 것 같아 뾰족해진 마음으로 아이가 '방금 수업에 다녀왔다'라고 대꾸했다. 답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20분쯤 후 관장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가 수업에 오지 않았다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 보라고 했다. 아이의 방으로 가는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은 어지러웠고, 다리는 휘청거렸다. 분명 도복까지 갈아입고 집을 나섰고, 거의 두 시간 만에 돌아온 아이는 이 추운 날 어디서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물으니, 아이는 순순히 고백을 했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중학생이 되도록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한 번 보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체력 강화를 위해 태권도장 하나 보내는데, 거기에 반항하며 ‘비행’을 저질러야 하는가. 실망스러움보다 억울함이 더 컸다. 이때 미친 듯 날뛰며 '엄마를 뭘로 보고 속이느냐’고 소리라도 빽 질러야 할까. 다행히 사춘기 아이와 대화할 때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화를 누를 수 있는 평정심은 있었다. 아이에게 잘못을 돌아보며 글을 써보라고 시키고 방을 나왔다. 


아이의 ‘반성문’은 반성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에 가까웠다. 아이는 자신을 '어리석고 나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그 말이 참 아팠다. 거짓말 몇 번 했다고 ‘나쁜 사람’이 되고 ‘거짓말쟁이’가 된다면 나쁘지 않고 거짓말쟁이 아닌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나는 그 나이에 부모를 속인 적이 없던가. 아니 심지어 어른이 된 지금도 거짓말 한 번 안 하고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거짓말’이라는 잘못된 행동을 ‘아이’에게서 분리시켜 주고 싶었다. 

“엄마는 거짓말 몇 번 했다고 네가 ‘나쁜 사람’이고 ‘거짓말쟁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어. 넌 ‘나쁜 사람’도 아니고 ‘거짓말쟁이’도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약간 놀란 듯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단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너를 거짓말하도록 꾀는 목소리가 있는 거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목소리가 너를 괴롭혀?” 

아이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대부분인 도장에서 뒤늦게 태권도를 시작한 자신이 잘 못할 때마다 아이들이 놀리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남의 시선과 판단에 흔들리고 상처받는 건 엄마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머리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던 아이의 모습을 되찾아 주고 싶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도 나도 잊고 있던 아이만의 스토리를.
 

회색 교복을 입는 유치원에 다닐 때도 아이는 분홍색이나 연두색 양말을 꼭 찾아 신고 갔다. 바로 얼마 전까지 “너 여자 아니야?”하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머리를 길렀다. 무려 4년이나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다녔는데, ‘여자애'라고 놀릴 때 대꾸하는 대신 안타를 멋있게 날리거나, 축구 골을 넣는 아이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걸 당당하게 해 나가던 자신을 아이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형도 같이 거짓말하고 빠진 적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혼자만 그랬다고 답했다. 큰애에게 확인하니 그것도 거짓말이었지만 오히려 칭찬을 해줬다. 같이 혼나자고 고자질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건 잘한 일이라고. 자기 잘못은 깨닫는 즉시 솔직히 고백하는 게 지혜로운 일이지만,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고.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갔지만 다행히 그 일로 쑥대밭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아이는 몇 번이나 내 방으로 와서 말없이 나를 안아주고 돌아갔다. 물론 화내는 대신 대화로 잘 풀었다고 자기만족하거나, 아이가 이제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다.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어떤 상황을 만날 때마다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기억하기를 바랐다. 이야기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춘기라도 아이가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면, 흔들리더라도 꺾이거나 뿌리 뽑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부는 바람을 멈추게 하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막을 도리는 없지만 아이만의 내러티브가 아이 가슴 깊이 뿌리내리도록 도울 수는 있다.


아이의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니 문득 '이야기의 힘'은 사춘기 아이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거짓말로 일어난 한바탕 소동 덕분에 '나만의 내러티브’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나만의 독특한 내러티브는 무엇일까,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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