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논리적인 증명 과정으로 도출하는 책
벌써 2024년이 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새해가 되어 설레는 마음도 조금씩 시들어간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구정이라는 두 번째 새해가 있으니, 두 번째 시작을 맞아 추천하는 책이 바로 빅터 프랭클의『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책을 ‘추천’하고 있다. 지금까지 브런치에 올렸던 책들도 물론 모두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었지만, 이 책만큼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제목을 하도 많이 들어봐서 언젠가 읽은 듯한 기독감(?)을 주는 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서모임의 한 회원분이 독서모임 도서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선정해 오셨다. 솔직히 별로 기대는 없었지만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성실히 독서를 했다. 책을 읽으며 이 책의 내용이 제목과 완전히 다름을 깨달았다. 제목은 ‘죽음‘을 강조하지만 그 내용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삶을 다루는 자세에 완전히 반했다.
독서 모임을 하는 날, 책을 선정하신 분께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민, 시련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는 모두 이 독서의 값진 산물이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은 나의 삶과 뗄 수 없기에 부끄럽지만 이 글에는 사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될 것 같다.
1)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원래부터 사람에겐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와는 그 결이 달랐을 뿐. 삶의 의미란 인생 전체를 꿰어내는 어떤 가치라고 생각했다. 나의 삶의 의미란 ‘성실함’이라 줄곧 생각해 왔다. 과거 학창 시절 때부터, 직장 생활을 하며 책읽고 글쓰는 지금까지 ‘성실’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또 나름 잘 실천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최선인지, 나는 성실하게 살고 있는지 현재로선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성실했는지는 사후의 판단이다. 게다가 '성실'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는 언뜻 생각하면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일과 관계 중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성실하다고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과 관계 모두 '성실'이라는 가치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삶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정의한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돼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p163)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선 안 된다니!
그동안 생각했던 삶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정의였다. 그런데 이 책의 논리에 의하면 완전히 납득이 된다. 삶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이 가르쳐준 대로 삶의 의미를 다시 고민해 보았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나의 삶의 의미는 첫째와 둘째에서 찾을 수 있다.
글을 쓰는 것
비록 아직 브런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작가이지만(하지만 남몰래 글을 쓴 지는 꽤 오래됐다) 현재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정말 사랑한다. 글쓰기는 지금 나에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는 일이며, 직업인으로서의 작가가 되는 꿈을 꾸게 만들어준다. 삶의 의미를 다시금 고민하지 않았다면 글쓰기가 삶에서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사랑
여기서 사랑은 가족과 애인을 향한 사랑이다. 이들과 사랑을 주고받을 때 나의 존재의 가치를 오롯이 느낀다. 죽기 직전 가장 먼저 생각나는 대상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일 텐데, 나는 아마 가족과 애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사랑이 삶의 의미라니 좀 오글거리면서도 어딘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2) 시련을 대하는 태도
작년, 나름의 큰 시련을 겪었다.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피할 수 없는 시련을 더 견디기 수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며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었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p110)
피할 수 없는 시련은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는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 시련으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은 품위 있는 것이 된다. 스스로를 뛰어넘는다는 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한다(이를테면 장애를 극복한다는 등)는 뜻이 아니다. 자기 초월은 시련을 묵묵히 견딜 때 일어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p209)
시련을 견디는 게 어떻게 자기 초월이 되는 거지? 처음엔 의아했다. 정신승리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떠올려보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된 불안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일상에 집중을 할 수가 없고 따라서 일상의 모든 일이 그 빛을 잃어버렸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차츰 개선이 되었지만, 약을 먹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그 불안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안간힘을 다해 견뎠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을 나가고, 끼니를 챙기고, 잠을 청하는 그 모든 일이 고역이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그 시기를 통과하고 나니 전보다 성장했음을 느낀다. 마음이 더 단단해졌으며 비슷한 고통을 가진 타인에 대한 공감의 시선이 생겼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자기 초월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본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소개하며 마무리하려 한다. 책 전체를 꿰뚫는 인간과 삶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가슴에 스며든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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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