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에서 소냐로
필명은 작가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글의 방향성, 자신의 가치관과 성격 등을 고려하여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필명을 만듭니다. 저도 브런치 활동을 시작하며 ‘윤슬’이라는 필명을 지었습니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입니다. 그냥 물결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빛을 받았을 때의 아름다움을 인식하여 ‘윤슬’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은은한 반짝임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그 속성을 닮고 싶었습니다. 저의 글도, 삶도 은은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내비치는 윤슬이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윤슬을 필명으로 사용하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관심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모습을 지향하는지, 어떤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친 이름이 바로 ‘소냐’였습니다.
소냐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지요. 그녀의 사연을 요약해 보자면 이러합니다. 소냐는 1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재혼을 하는데, 새어머니의 나이가 무려 25살입니다. 소냐에게는 함께 사는 삼촌 바냐가 있는데 그 삼촌은 우울증에 걸려 마약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새어머니를 짝사랑하여 적극적으로 대시하기도 합니다... 소냐의 집에 자주 방문하는 젊은 의사 아스트로프가 소냐의 유일한 탈출구인데, 그 의사 또한 자신의 새어머니를 짝사랑합니다.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소냐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제가 희곡 <바냐아저씨>를 처음 접한 건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였습니다. 이 영화는 <바냐 아저씨>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의 관계와 감정 변화를 소재로 삼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연극 무대신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냐의 대사 부분이었죠.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금도, 나이 든 후에도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
저는 이 대사가 소냐라는 인물의 성숙함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단서라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소냐의 성숙한 태도를 ‘선한 강인함’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선 강인함이란 시련을 직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심지어 시련에도 자기 초월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냐는 시련을 회피하지도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시련을 직면하고 긍정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자기 초월‘을 이루어냅니다. 소냐의 삶의 태도를 굳이 ‘선한’ 강인함이라 표현한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강인함을 선하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소냐의 주변에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삼촌 바냐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결국 마약에까지 손을 대지요. 자신을 초월한 소냐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한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냐는 그녀의 강단으로 바냐까지 감정의 늪에서 건져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자고 말하며 그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손을 내밀어 줍니다.
소냐의 선한 강인함을 닮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에도 그 속성이 묻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필명을 소냐라 지으며 그 바람을 다짐으로 전환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들의 삶이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