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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미 Jun 01. 2021

백수는 다시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친 백수라는 아이러니

올해 2월 초, 난 퇴사를 했다. 고작 6개월을 다녔고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보이는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그만둔다는 것은 쉽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겉으로 보기에 큰 실패처럼 보이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고 그 다음에는 화가 났지만 결국에는 후련했다.


퇴사 이후로 약 4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을 했다. 일단 미뤄두던 강의 제작을 빠르게 시작했다.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하고 회사를 다니는 중에는 엄두를 못 냈던 큰 단위의 강의 제작에 들어갔고 이제 하나둘씩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는 중에는 '지금 가장 빠르고 쉽게 제작할 수 있는게 뭘까'를 생각했다면 이제는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 더 쏟아야 하는 강의도 기획을 시작한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계약서를 쓰고있다. 강연, 강의, 다른 회사와 협력하는 분석 프로젝트, 출간 등 근로계약서 말고도 세상에 내가 쓸 수 있는 계약서가 이렇게 다양하구나 싶을만큼 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연히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으니 내가 현재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위주로 받는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누군가가 주는 우선순위에 따라서 일을 했다면, 회사 밖의 일들은 내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내 전문성과 시간에 가치를 매기는 것도 나고, 일들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도 나고, 그리고 그 일들을 끝까지 완수해내야 하는 것도 나다. 이 책임감을 누군가와 나눠서 질 수 없을까 고민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휴식과 일의 균형이 깨졌다.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원래도 프로젝트를 하거나 일을 하는 중간에 pause 버튼을 누르지 못해 쉴 새 없이 생각을 하는 타입인데 좋게 말하면 몰입이 잘 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중독이다. 회사를 다니면 회사와 사회가 강제적으로 부여하는 쉬는 시간이 있다. 주말, 퇴근 후 저녁. 그 시간에 일을 한다고 회사가 월급을 더 주는건 아니니까, 아무리 일을 더 하고 싶어도 내면의 회의론자가 나를 말렸다. '너 그러면 호구야. 빨리 퇴근해. 쿨하게 일어서.' 휴식을 도와주던 그 내면의 회의론자는 퇴사와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휴식도 사라졌다.


일과 쉼의 경계가 사라지면 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닌 그 회색 지대에서 괴롭고 답답하고 그런데 이 상황을 토로할 곳은 없는, 아무튼 사방이 막힌 벽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남들처럼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지친 상태를 나조차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가 어렵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몇 일 씩 계속되고 있는데 일단 내가 찾은 원인은 이거다. 제대로 쉬고 있지 못하다는 것. 백수는 다시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친 백수는 아이러니가 아니고, 백수에게도 쉼과 일의 루틴이 필요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이 내게 자유를 줌과 동시에 부담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도 부정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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