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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영 Oct 05. 2022

남산타워(1)

남산타워에 즐거운 기억 새기기

코스 요약 : 명동성당 - 명동역 - 남산 케이블카 - 남산 타워 - 예반 돈가스 - 서울역 - 서울역 롯데마트 - 수원역 - 병점역 - 집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베짱이였나 봐. 생산적인 일 빼고는 다 잘하지."


광복절도 지났는데 일요일 아침부터 안예은의 '8호 감방의 노래'를 칼림바로 진지하게 연주하던 나. 폴댄스 졸업공연을 위해 선정해둔 곡이었는데 갈비뼈 부상으로 물 건너갔으니 칼림바 연주로나마 그 아쉬움을 달래 보려 했다. 칼림바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팝잇을 꾹꾹 누르듯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 거려서인지 마음이 쉬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어 하루 종일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딩가딩가 칼림바를 연주하면서 베짱이 놀음하던 나의 흥을 오를만하면 깨고 오를만하면 깨는 소리가 있었으니,


"키즈카페 가!"            

"버스 타고 마트 가!"

아이도 모른 척 가만 두면 하루 종일 밖에 나가자고 재촉할 같았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그래. 가자 가!"

이번에도 역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일단 길을 나서고 보았다. 염원하던 외출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상윤이를 보고 있자니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김상윤이야.(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사 인용)'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아직 여름이지만 뜨겁지 않은 햇살과 가을의 선선한 공기가 피부에 닿아 기분도 좋은 날, 봄날의 햇살 김상윤과 함께 하는 버스 타고 산책 스타트.


'버스정류장에 가서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탈테다.'


이럴 수가! 하필이면 그 버스가 서울역행 2층 버스라니. 나는 이 아이랑 무언가를 할 때 하기 주저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고민과 갈등의 시간 동안 기다림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것이 거기에 해당된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 나는 치밀한 계획적 인간이었는데 이 아이를 만난 후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는 무계획적 인간이 되었다. 계획을 세워봤자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 스트레스만 받을 뿐. 냅다 저질러 버리면 편하다. 그러니깐 일단 타자.


강남행 버스는 많이 타봤지만 서울역행 버스는 처음이라 버스에 타자마자 어디에서 내려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상윤인 2층 버스를 타서인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바깥 한번 보고, 날 한번 쳐다보고 웃고... 그러다가 마주한 남산타워.


5년 전 회사에 다닐 때 남산타워 뷰가 멋졌던 호텔에서 간담회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담당이었고 내 회사생활 마지막 업무가 된 간담회. 간담회가 끝나고 단원 전체의 뒤풀이 자리, 담당자인 나는 마무리까지 책임져야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던 남산타워가 정말 멋지다며 "선생님 잠깐만 가만히 계세요. 사진 찍어 드릴게요." 했던 동료가 생각이 났다. 사진 속 멋진 남산타워와 대조되게 내 모습은 한껏 경직되어 있었다. 입은 미소 짓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빨리 이 파티가 끝나길 바랐다. 어린이집에 두고 온 두 녀석이 엄마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상우야, 엄마 왔어!"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풀 죽어 뒤돌아 훌쩍이던 상우의 작은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진 않았다. 서둘러 KTX를 타고 오송역에 내려 주차된 차를 타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통합보육 전에는 데려올 수 있을까... 저릿. 남산타워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애잔한 기억에 나는 가슴이 저며 들곤 했다.


"엄마 남산타워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가볼까?


목적지를 정하고 나자 내릴 정류장은 저절로 정해졌다. 명동에 내려 명동성당과 명동역을 거쳐 걸어 올라가 보기로 했다.


하늘과 푸르름과 명동성당과 봄날의 햇살

'케이블카를 태워주자!'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그 길을 상윤이는 분명 좋아할 것이다. 편의점에 들러 간식과 음료수를 사고 지도 앱을 보며 걸어가는 길에 만난 명동성당은 그 역사적 의미만큼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라는 사람은 딱히 종교를 두고 있진 않다. 종교적 믿음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종교의 역사와 존재의 의미를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쪽이다. 어쩌면 나의 게으름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을 에둘러 핑계 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를 봐도 성당을 봐도 사찰을 둘러봐도 똑같이 그 신성함에 압도될 수 있는 건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기 때문이라 믿는다. 이번엔 그저 지나가는 길의 포토 스폿에 불과했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명동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둘러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그저 봄날의 햇살을 빛나게 하는 예쁜 하늘과 푸르른 나무 같은 배경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를 눈에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의미든 저 의미든 나는 다 좋지만...


예전엔 어떻게 이 거리를 지도 어플도 없이 찾아다녔을까 싶게, 사람 많은 미로 같은 골목골목을 겨우 빠져나왔다. 과거에 익숙했던 길도 한참이 지나 다시 찾으면 낯선 곳이 된다. '낯설다'라는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라 뒤에 말을 더 붙여본다. 낯설지만 새로움? 아니다. 낯설지만 반가움? 그것도 아니다. 20대 초중반 친한 친구들과 자주 걸었던 이 골목 구석구석은 지금, 그저 낯설고 불편한 길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깐 빨리 지나가자. 상윤아, 엄마 손 꼭 잡고 잘 따라와야 해.


탈출 미션 같았던 명동역을 빠져나와 남산 케이블카까지 올라가는 길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제법 걸을 맛 나는 운치 있는 오르막길은 그냥 걷기만 해도 화보 같았다. '운동화 신겨 올걸.' 사진 속 상윤이의 파란색 크록스가 마냥 아쉽다. '담쟁이덩굴이 집 담벼락을 덮으면 그 집 기운이 안 좋아진대. 저기 저 담쟁이덩굴 집주인이 큰 병에 걸렸다더라.' 제주에서 친정엄마가 했던 말를 떠올리면서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길게 이어진 벽을 따라갔다. 저 건물의 주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보는 이에겐 묘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 동화 속 환상을 꿈꾸게 했다. 


상윤이 머리 위로 케이블카가 지나갔다. 나는 내려오는 케이블카와 상윤이와 케이블카 탑승장을 사진 한 장에 모두 담고 싶었는데 상윤이는 머리 위 지나가는 케이블카에는 관심 없고 들고 있는 오레오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오레오를 반으로 가르면 안에 든 크림이 꼭 한쪽에만 묻는다. 크림이 묻어있는 쪽과 크림이 없는 쪽 중에 고르라고 내밀면 상윤이는 꼭 크림이 묻어있는 쪽을 고른다. 상우라면 크림이 묻어있는 쪽을 한 번 골랐다면, 한 번은 '이번엔 엄마가 이거 먹어. 아까는 내가 맛있는 거 먹었으니깐 이번엔 엄마 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윤이는 과자 한 봉지를 다 먹을 때까지 크림이 묻어있는 쪽을 골랐다. 괜찮아. 엄마는 이런 거에 전혀 서운해하지 않는단다, 얘야. 네가 어느 쪽을 선택했든 엄마와 나누어 먹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할 뿐이란다.

 

다음에 우리 이 길을  또 함께 걷자. 그러니깐 과자 그만 먹고 주변 좀 둘러봐줄래? 엄마도 한 번 봐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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