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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영 Oct 05. 2022

남산타워(2)

남산타워는 왕돈가스

"어른 한 명, 아이 한 명이요. 아이는 장애인이에요."


매표소 직원에게 복지카드를 보여준다. 나는 18살에 처음 신분증이라는 게 생겼는데 상윤이는 그보다 훨씬 빠른 7살에 이미 신분증이 생겼다. 복지카드를 만들 당시 상윤이를 데리고 사진관에 가는 것조차 큰 어려움이었다. 낯선 남자의 굵고 큰 목소리와 어두운 스튜디오, 플래시가 번쩍! 얌전히 앉아 있을 리 없었고 울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남에게 보여줄 일이 얼마나 되겠나'는 생각에 상윤이를 거실 흰 벽에 세워두고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제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름 만족스러웠는데 이 아이의 신분증은 생각보다 훨씬 보여줄 일이 많았다는 것.  장애인 할인이 되는 모든 곳에서 상윤이의 복지카드가 필요했다. 비행기 탑승, 관광지는 물론, 심지어는 대형 키즈카페에서도 이 복지카드를 꺼내 들어야 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하루 네다섯 번도 더 지갑에서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찍을 걸.'

매표소 작은 구멍으로 복지카드를 밀어 넣을 때면, '우리 아이 봐주세요.'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장애정도 중증이라고 적힌 글귀 옆 상윤이의 사진이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너에게 더 넓은 창을 내어주고 싶다.

남산타워 케이블카는 만 12세까지의 소아 장애인은 무료여서 어른 요금만 내고 표를 받았다. 편도로 끊고 내려올 땐 산책하며 걸어 내려올까 생각했다가,

'상윤이는 케이블카를 타면 엄청 좋아할 거야. 걷는 건 매일 하는 일상이지만 케이블카를 타는 건 특별한 일잖아!'

마음을 고쳐먹고 왕복으로 끊었다.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창이 나 있어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가만있지 못하고 그 좁은 칸을 뱅뱅 도는 상윤인데, 이렇게 창을 내어 놓은 엘리베이터는 바깥구경을 하며 얌전히 타고 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너에게 더 넓은 창을 내어 주고 싶다. 더 높이, 더 멀리 보여주고 싶다.


케이블카가 바로 도착해 대기 없이 탑승할 수 있었다. 타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했다. 예상이 맞았다. 상윤이는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뚫린 시원한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는 듯했다. 이 아이의 마음을 귀로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표정, 눈빛 그리고 행동으로 더 정확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올라갈수록 도시는 작아졌고 세상은 넓어졌다.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을 몰라주고 케이블카는 너무 빨리 정상에 도착했다.


말 안 해도 다 알아. 너 지금 굉장히 즐겁지? 나도 그래.


드디어 나도 남산타워에 와봤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의 남산타워는 오히려 닿을 수 있을 듯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올라오니 더 멀게 느껴졌다. 멀리 있을 때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한라산, 롯데월드타워, 메타폴리스, 남산타워 그리고 남편. 갑자기 두고 온 남편과 상우 생각이 난다. '이 풍경을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떨어져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니깐 이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그냥 남겨두자.(뒤에 ㅋㅋㅋ를 너무 붙이고 싶다.)


남산 꼭대기에 탑만 뾰족하게 솟아 있을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넓은 광장을 보고 놀랐다. 지금처럼 인터넷 문물이 발달하기 전 - 세대 인증인 것 같아 이 용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 PC통신 채팅방에서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 다들 하나같이 대게 웃기지도 않고 말 같지도 않은 질문들을 하곤 했다. 너무 '응답하라' 같은 얘기지만, 그땐 저가 항공사도 없을 때여서 제주도 여행이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은 시절이었다. '너희는 그럼 귤 먹고살아?', '집 나가면 바로 바다야?', '너희는 다 수영 잘하겠다.', '한라산에서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져?', '한라산에서 신발 떨어뜨리면 바다에 떨어져서 못 찾아?' 같은 질문들. 가장 어이가 없었던 질문은 '너희도 PC 통신돼?'였다. 지금 너희랑 하고 있는 건 그럼 뭔데.


이런 옛 생각을 하다 보니 겨울이면 귤을 많이 먹어 얼굴과 손이 샛노래져서는 누구 손이 더욱 노란지 비교하며 웃어댔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생각이 났다. 수능이 끝나고 육지로 대학 면접을 보러 갈 때, '진짜 교수님들이 황달 걸렸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왜 하필 면접은 겨울에 보는 거야.' 제주도 괴담같이 떠도는 소문을 직접 마주하게 될까 두려움에 떨었던 순수함. 분명 그게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어디 갔니?


아무튼 남산 꼭대기에 탑만 덩그러니 뾰족하게 솟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나, 한라산에서 공 차면 바다로 떨어지냐고 물었던 그 익명의 아이랑 다를게 무엇일까.


예전엔 낭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흉물로 느껴지는 사랑의 자물쇠를, 혹여 상윤이 피부에 닿을까 옷에 묻을까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한 줄로 빠르게 지나갔다. 전통 무예 공연을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상윤이는 관심이 전혀 없이 그대로 스쳐 지나듯 패스. 타워 전망대는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분명 나는 이만큼의 돈을 내면 아까워서 관심도 없는 상윤이에게 억지 감성을 자극하다 스트레스받을 게 분명하니 이것도 패스. 그렇게 남산타워 둘레를 빙빙 돌다가 그냥 내려오기는 아쉽고, 뭘 해야 될지는 모르겠기에 뭐라도 먹고 가자고 했다. 지금껏 여행을 다니며 느낀 게 있다면 본 것보다 먹은 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거다.



남산은 왕돈가스가 유명하다. 사실 잘 모른다. 잘 모르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무한도전 남산 추격전의 한 장면에서 왕돈가스를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케이블카 매표소에서 왕복 티켓과 돈가스를 세트로 묶어 파는 것을 봤다. 상윤이는 돈가스를 좋아한다. 9살 상윤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와 돈가스. 8살까지만 해도 된장찌개 속 두부였는데 바뀌었다. 상윤이는 그래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의리가 있는 편이다. 약 7년 동안 타요를 좋아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 카레를 4개월째 거의 매일 먹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는 매일 돈가스를 먹었다. "엄마가 좋아, 타요가 좋아?" 물어봤을 때,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타요를 이겨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걸로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지. 왜냐면 내가 타요보다 널 더 사랑하니까. 앞으로도 끈덕지게 하지만 기대 없이 물어볼 거다!


케이블카 승하차장 근처에서 돈가스 가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 헤매고 있을 때, 사진, 액자를 판매하는 할아버지가 어딜 찾고 있느냐 물었다. 돈가스 가게가 어디 있냐고 묻자 왠 문하나를 열어주며 이리로 내려가면 나온다고 했다. "후문이야!"라며... 어둡고 좁고 경사진 계단을 내려가는데 나 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내려가는 동안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법. 이래서 호러, 스릴러, 판타지 영화는 보면 안 되는 거다. 왠지 길을 알려준 친절한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악당의 최고봉이거나 우릴 다른 세계로 보내버리는 마법사 일 것 같다.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았고 다행히 상상에 머물렀다. 후문을 통해 내려와 덩그러니 어리둥절한 우리를, 딱 보기에도 머리 위에 물음표가 3개씩 떠 있는 직원분들이 잠깐 쳐다보다가 안내해 주었다.


이야!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단 말이야? 땅바닥을 좋아해서 몇 년째 1층에 살고 있는 나는 살면서 이런 시티뷰의 고급 레스토랑에는 가본 적이 없는... 있는데 기억이 안나는 것 같다. 그건 쉿 비밀이니까.


분홍 주름 빨대도 고급스럽게 느껴지고 왕돈가스도 고급 음식처럼 느껴지는 남산 시티뷰


어쨌거나 땅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이곳에서 나는 최고로 호화롭게 왕돈가스를 먹겠다. 이래서 모두들 뷰! 뷰! 하는 거구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혀있는 분홍색 주름 빨대가 마치 상윤이 파란색 크록스처럼 이질적이고 촌스러웠지만 그 조차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시티뷰의 신비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돈가스는 언제 나오냐며 상윤이는 종이컵에 따른 냉수를 홀짝홀짝 마시곤 했다.


바삭바삭한 식감의 갓 튀긴 왕돈가스를 좋아하는 상윤이는 부먹파라 여겨진다. 어쩌면 상윤이는 돈가스가 아니라 카레라이스처럼 돈가스 소스에 밥을 비벼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닐까? 카레라이스와 하이라이스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이건 확신할 수 있는데 상윤이는 모르고 있다. 이 세상에는 카레의 맛이 엄청 다양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주재료부터 차이가 나지만 밥에 비벼 먹으면 다 똑같지 뭐. 하이라이스를 밥에 비벼 먹으면 '이것도 카레의 한 종류인가 보다.' 하지, '뭔가 맛이 카레랑 다른데 어떤 재료로 만든 걸까?' 하진 않을 거다. 적어도 우리 상윤이는. 그렇다면 하이라이스와 돈가스 소스를 구별할 수 있을까? 그건 더욱 어려운 문제다. 그러므로 상윤이 기준에서 카레라이스=하이라이스=돈가스 소스의 공식이 성립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타당할지도 모른다.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을 때 이치가와 역 돈가스 가게에서 오래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이름 '돈카츠 이나바 와코'. 가게 마감 1시간 전부터 남은 돈가스는 마감 세일로 반값에 팔고, 그래도 팔리지 않은 돈가스는 당일 폐기처분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져가곤 했다. 나는 퇴근 후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돈가스를 간식 삼아 먹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돈가스 샌드, 저녁도 가게에서 돈가스 정식을 먹었다. 그러다 보면 돈가스가 물리는 날이 오는데, 그럼에도 끈기 있게 계속 먹다 보면 어느 순간 마치 밥처럼 물림이 극복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상윤이랑 다니면서 그 물림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플러스 카레랑.


카레랑 돈가스만 먹는다고 해도 나는 상윤이가 잘 먹으면 그저 좋다. 아이를 낳고 나서 식성이라는 게 없어지고 어쩔 땐 잔반통이 된 기분이 들 때도 가끔 있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맛있게 먹을 거다. 좋아하는 게 같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까. 설령 그게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엄마는 최대한 좋아하는 척을 할 거다. 


남산에서 상윤이랑 엄마랑 같이 먹었던 그 왕돈가스 정말 맛있었어. 상윤이도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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